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진 Nov 17. 2022

나의 (여군) 중대장님

만남의 중요성

 군생활 가운데 한차례 여군 직속상관과 근무한 적이 있다. 군 전체를 통틀어 여군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 명만 부대에 있는 경우는 드물고, 여군이 근무하는 부대들은 대부분 정해져 있기에 근무하던 부대나 주변 동기들을 봐도 부대에 몇 명씩은 꼭 있었다. 나의 경우 근무하던 부대에 여군이 4-5명은 늘 있었고 여군과 가장 가까이에서 근무했던 경우는 소대장 시절의 중대장님이었다. 소대장의 시간을 겪으며 몇 분의 중대장님과 함께 했는데 그중의 한분이 여군이었다. 좋은 사람과의 만남은 얼마나 한 사람을 크게 성장시키는가. 인생길 위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인생에 축복된 일이 있을까. 소대장 시절 나의 여군 중대장님은 군생활 통틀어 나에게 가장 많은 가르침을 주신 분이시고, 군 생활을 넘어 현재까지 그분의 좋은 영향력은 이어져 오고 있다. 

 중위 2년 차. 한창 군생활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여군 중대장님의 전입 소식을 들었다. 그분의 전입 소식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혹시나 예정보다 빠르게 전역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었다. 앞서 밝혔듯 군대는 사임 의사를 밝힌다고 해서 바로 전역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정해진 복무 기간을 모두 채워야만 전역할 수 있다. 당시 2년의 복무 연장을 신청하고 후회하던 내게는 아직도 2년 반이라는 긴 군생활이 남아있었고, 남은 날들을 헤아려보니 군대에서의 앞날이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다. 전역이 간절하던 그때 여군 선배의 전입 소식을 들었고, 나보다 군 경력도 오래고 경험도 많으시니 혹시나 빠르게 전역할 수 있는 길을 알고 계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나는 그를 기다렸다. 

 드디어 그분이 전입 오는 날이 되었다. 첫 만남의 순간 나는 이미 그분이 좋았다. 겪어본 바로는 여군은 대부분 초면에도 쉽게 서로 친근감을 느끼고, 호의적이었다. 병과가 다르다 해도, 짧은 만남이어도 온정을 베풀어 주는 선배들을 많이 만났고 동병상련으로 서로의 상황에 대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쉽게 친해지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직업이 그 사람의 인격은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좋을 수만은 없기에, 사람에 따라 도의적인 호의는 있을지라도 본심은 그렇지 않거나, 인격이 성숙하지 못하거나 별로 가깝게 지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종종 마주할 때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감사하게도 나는 너무나 좋으신 분을 직속상관으로 만났다. 군생활 가운데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살면서도 그만큼 따뜻한 분을 만난 일은 드물었다. 한없이 베풀고 또 베풀면서도 지혜롭고 현명하고 따뜻한 분을 중대장님으로 만나게 된 것은 좋은 일이었다. 배울점이 많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분을 통해 전역의 길을 찾을 수는 없었다. 평생 군에 계실 것 같은 태도로 헌신적으로 근무하시던 그분은 웬일인지 중대장 보직을 끝으로 전역을 앞두고 계셨다. 그분은 군생활 10년 차에 사랑하던 군을 떠나기로 결정하신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중대장 보직을 받고 나와 만난 상황이었다. 그러한 그분께 차마 나의 마음과 상황을 말할 수 없었고, 말했다고 해도 별다른 해결책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분 역시 장기 복무자임에도 전역이 가능한 10년 차에 비로소 전역이라는 길을 택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군생활이 힘들었지만 불명예 전역은 하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할 용기도 없었다. 그저 중대장을 보좌해 내게 주어진 일을 하며, 그분께 배우며 함께 군 생활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당장 전역은 할 수 없었지만, 의지할 사람이 있는 군생활은 한결 안정적이 되었다. 여전히 힘들고 해야 할 일은 많았지만 그럼에도 힘들면 그 힘듦을 에둘러 포장하지 않고 상담할 수 있으니 숨통이 트였고, 이미 같은 길을 앞서 다녀간 선배이기에 군생활 전반에 걸친 구체적인 조언도 얻을 수 있었다. 그분에게 전역까지 주어진 마지막 시간은 10개월. 함께하는 시간 동안 어느새 마지막 날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그분의 군 생활은 엄청나게 헌신적이었다. 물론 주변에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분은 보는 사람이 가끔 마음이 아플 정도로 헌신적으로 군생활에 임하며 지냈고 언행일치의 표본이었다. 오히려 '언'보다 '행'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릴 정도로 희생과 헌신이 가득했다. 밤샘 근무 후 현장에 나가서 함께 작업하시는 모습, 날이 밝도록 주어진 일이 끝나지 않으면 퇴근하지 않는 모습, 본인의 사비를 털어서 중대 간부들과 중대원들에게 자주 베푸는 모습, 소대장들과 초임간부들에게 시간과 조언과 맛있는 식사를 아낌없이 나누는 모습.. 무엇보다 그분은 칭찬과 격려의 끝판왕이었다. 어디서 그렇게 끝없는 에너지가 샘솟는지 힘들고 지친 마음을 털어놓으면 칭찬과 격려로 마음 깊숙이 파묻혀있던 용기를 이끌어내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얻도록 도와주시곤 했다. 하지만 사람의 에너지는 결국 한정적 이기에, 과도한 업무에 지친 어느 날은 병원에 입원하기도 해서 그 모습을 보며 안타까웠던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분과 함께 하고 싶은 것과는 별개로 그의 전역을 반겼고 지지했다. 그분을 좋아했기에 그분의 전역을 반겼다. 전역해서 그분이 편안한 직장에서 일하고, 덜 헌신적으로 사시고, 본인의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길 바랬다. 추측컨데 그분은 군을 많이 사랑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아붓고 마침내 한계에 부딪치신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고,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들과 이런저런 상황들에 대한 실망. 그리고 개인의 삶을 찾아가겠다는 생각 등의 복합적인 이유들로 전역을 결정하신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분은 군을 떠나며 나는 오래도록 군에 남기를 바라셨다. 본인은 본인의 의지로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비록 이곳을 떠나지만 이곳의 좋지 못함이 이유가 아니기에, 나는 이곳에 남아 진급하고 성장하며 좋은 것들을 누렸으면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후배가 군에서 뜻을 펼치며 자아실현하고 행복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나 역시 주변에 여군의 길을 걷기 위해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막지 않는다. 판단은 결국 본인의 몫이니 최대한 나의 판단을 배제한 조언을 건네려 노력한다. 어떠한 삶이든 마음의 소리를 따라 스스로 선택한 길을 스스로의 의지로 능동적으로 겪어나가는 삶은 행복한 삶일 테니.

 마지막 날은 슬펐다. 인사이동시기 전이라 후임자는 따로 없었고, 얼마 전 대위로 진급한 내가 그분의 뒤를 이어 당분간 중대장의 임무를 수행하기로 했다. 오랫동안 겪은 중대였기에 특별히 인수인계받을 일은 없었고, 마지막날의 이임식은 눈물바다였다. 부디 울지 않고 떠나기를 바랐지만, 10년의 회한이 담겨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막을 길은 없었으리라. 보내는 입장에서도 아쉬웠지만 훗날을 기약할 수 있는 헤어짐이었기에 감사했다. 중대 송별회를 끝으로 그분은 떠났다. 모두 모여서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더 크고 넓은 세계로 나가서 이제는 자유롭게 사시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헤어짐은 언제나 아쉽지만 오래도록 근무했던 사랑했던 직장을 원하는 때에 모두의 축복 속에 떠날 수 있는 일은 얼마나 복된 일이었을까. 

 군인 시절 한때 중대장을 꿈꿨던 시간이 있었다. 장교의 보직은 병력들을 거느리는 지휘관 보직과 행정업무인 참모 보직으로 나뉘는 것을 입대 후 알게 되었고, 입대 시 그렸던 군인의 모습은 단연 지휘관의 모습이었다. 결국 원했던 보직은 끝내 맡아보지 못하고 예정대로 전역의 길을 택했지만, 그분의 떠남으로 인해 잠시 중대장의 역할도 해보고, 나 역시 길었던 첫 부대의 생활을 중대장 보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기에 감사했다.  

 오래지 않아 인사이동시기가 되어 후임 중대장님이 전입 오게 되었고, 나 역시 예정대로 새로운 부대로 떠났다. 10개월의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그 시간 동안 나는 조금 더 단단해졌고, 끝내 무너지지 않고 남은 군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비대대의 혹한기 훈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