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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사실 위로의 말들

태지원. 평범한 말들의 편 가르기, 차별의 말들

by 수진

그간 읽었던 저자의 책들도 좋았지만 이 책은 손꼽게 좋았다. 작가로서, 그리고 오랫동안 사회를 가르치고 사회현상에 관해 탐구해온 저자분의 무르익음이 느껴졌다.

긴 시간 자신을 담아 글을 써오던 저자의 글은 정교하고 세밀했고, 관심사에 따라 배움의 영역을 넓히던 저자의 세계가 담긴 내용은 깊었다.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과, '그림의 말들'을 통해 위로를 건네오던 저자. 한편으로 이 책은 그림을 통해 오래전부터 위로를 말하던 저자의 사회학 버전이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익숙하지만 사람 사이에 편을 가르는 단어들에 관해 파헤친다. 언어들에 숨은 고정관념과 편견의 틈새들을. 노련한 저자는 단순히 사실을 다루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건넨다. 그만의 방식으로.


-나는 유려한 문장력이나 뛰어난 표현력을 갖춘 사람은 아니다. 문학적 상상력도 부족하다. (중략) 정보를 담은 글쓰기나 책 쓰기에 필요한 몇 가지 재능이 내 안에 존재함을 발견했다. 먼저 나에겐 자료를 빠르게 찾아내는 능력이 있다. 두 가지 이상의 분야를 엮어서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지식을 엮어 글을 쓰는 데 유리한 자질이다. <태지원, 그림의 말들>


자신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쓸 수 있는 글이 있다. 진지한 고찰을 타인에게 닿을 수 있는 언어로 엮는 어휘력이 있어야 쓸 수 있는 글. 이 책은 그 언어로 쓰였다. 무르익은 저자는 자신의 특장점인 자료를 찾아내 지식을 엮는 실력과 스스로 부족하다고 고백했지만 긴 시간 글을 쓰며 연마했을 문장력과 표현력을 버무려 정상, 등급, 완벽, 가난, 권리, 노력, 자존감, 공감에 관한 이야기를 펼쳐낸다. 그 이야기 끝에 마침내 남는 것은 위로다. '괜찮다'라고 직접적으로 끼얹는 위로가 아닌, (아마도) 자신의 성정을 반영했을 담담하고 사실적인 위로.

-우리가 평범과 평균의 삶이라고 믿는 것 중 대다수가 광고나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진 잣대일 가능성이 높다.(중략) 평범이나 평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면, 그 말의 의미를 한 번쯤 되짚어 보는 게 좋다.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단어와 그에 딸려오는 이미지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든 이에게는 자신에게 맞는 삶의 형태와 행복이 각기 다르게 존재한다는 것, 최상위 계단에 오르는 것만이 삶의 최종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계급표를 벗어난 우리 저마다의 삶과 행복이 열리지 않을까.

-흠결 없는 이상적인 상태를 뜻하는 것이 완벽이라면, '온전'은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훼손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중략)이 불완전의 세계에는 불량이나 미완의 상태가 존재하지 않는다. 불완전한 세계를 찾아가는 시도가 필요한 때다.

-가끔은 생각한다. 모든 인간은 하나하나의 텍스트가 아닐까. 각자 삶의 맥락과 이야기를 품은 텍스트 말이다. (중략) 그래서 우리는 관성을 물리치고 새로운 책장을 펼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타인이라는 텍스트를 읽으려는 노력, 그 지점에 서야 비로소 열리는 시선과 세계가 있으니까.

그 위로는 얄팍하거나 애매하지 않다. 그것은 저자 자신의 삶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삶의 서사 속에서 성장한 저자(책을 통해 고백한다.)가 내어주는 위로는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책의 내용을 떠나) 저자의 삶을 놓고 보았을 때 방대한 이야기를 펼쳐내는 이 책은 한편으로는 저자의 자기 계발서 같았다. 좀처럼 가늠되지 않는 그의 넓은 내면세계. 진심으로 성장하기 원할 때 우리는 주어진 환경과 자기 자신을 초월해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는가. 그래서 저자가 쥔 단단함은 진짜였다. 최선을 다해 삶에 맞선 이가 쥘 수 있는 단단함. 쉽게 흔들리지 않고, 다른 것에 자리를 내어주지 않을 단단함. 개인적으로 그 지점이 저자가 건네는 이야기들과는 별개로 위로가 되었다. 누구나 자신 안의 성품들을 꽃피울 수 있겠다는 생각에 한 명의 사람으로서 나의 성장을 기대할 수 있어서. 그리고 자주 부족한 양육자(나) 밑에서 자라는 아이지만 그럼에도 아이는 자신의 현명함으로 나의 한계를 초월해 자랄 수 있는 존재라 여겨져서.

나는 궤도를 벗어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래전 남들과 다른 삶을 살자고, 나의 삶을 살자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패기는 현실을 가늠하며 자주 또 자주 불안함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 책은 용기와 대범함은 자주 사라지고 눈앞의 현실에 연연하며 부족하고 편협해지려 하던 나의 세계의 지원군 같았다. 그래서 나에게 더욱 위로의 말들로 읽혔는지 모른다.

더불어 와닿았던 것은 저자의 용기였다. 스스로의 생각으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것과 생각을 텍스트로 변형해 다른 사람에게 펼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저자는 당연하다고 여겨진 사회 현상이 반영된 말들에 의문을 제기한다. 답이라 여겨져 왔던 일도 틀릴 수 있고, 유일하지 않으며, 각자의 고유한 세계가 있다고. 그것은 폭력일 수 있다고 때로는 강인한 어조로 말한다. '글'이라는 고요한 형식을 빌렸지만 그의 언어에 담긴 것은 용기였다. 글을 가로막는 것은 사실 자신 안의 무수한 금기와 자기 검열 아니던가. 저자 또한 글을 쓰며 익히 부딪쳤을 그것들을 조금씩 뛰어넘어 언어로 풀어냈다. 분명 어느 순간에는 큰 용기도 필요했을 것이다. 자신을 뛰어넘는 용기에 그치지 않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침내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며 그는 자신에게 고유한 텍스트를 덧붙였다.


나는 어떤 텍스트를 품고 있는가. 나라는 텍스트는 타인에게 어떻게 읽히는가. 그리고 나의 삶에 등장하는 이들은 어떤 텍스트를 품고 있는가. 나와 다른 타인의 텍스트를 읽어내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래서 또 읽고 쓰는 일을 멈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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