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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Dec 05. 2022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임관 직후 16주 동안 대전에서 초군반 교육을 받으며 알게 된 아이가 하나 있었다. 개인적 친분은 크지 않았으나, 스스럼은 없는 관계였고 '좋은 동기'라는 표현이 적절했던 아이였다. 그와의 친분은 변함없었지만 인연이 조금 특별해진 계기는 자대 배치를 받은 후였다. 내가 근무하게 될 부대에 그의 동생이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곳에 약간의 친근감이 생긴 기분이었다. 자대 전입 후 그 아이의 동생은 내게 인사를 해왔고, 소속을 달랐지만 크지 않은 부대였기에 오가며 종종 마주쳤고 반갑게 인사하는 관계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그 아이의 동생은 전역날이 되어 떠났고, 군생활의 인연으로 그의 동생과 가끔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믿고 싶지 않은, 지금도 간절하게 부정하고 싶은,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겨울을 앞둔 늦은 가을밤이었다. 주말 외박을 나온 소대원들과 저녁식사 약속이 있어 만나러 가던 택시 안에서 믿을  없는 소식을 들었다. 오랜만에 걸려온 동기의 전화를 반갑게 받았던 내게 들려온 것은 청천벽력의 비보(悲報)였다.  아이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심장이 한순간 내려앉았다. 예상 못한  전해 들은 비극적 소식에 한동안 아무 생각도   없었다. 온몸이 떨려오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당시  아이의 나이가 고작 26 정도였을까.  같고 해맑던  아이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다.  아이는 아직 꽃도 아니다. 너무 어린 생명이었다...  활짝 피지도 못했으니깐. 만개해 보지도 못했으니깐.  아이는 그렇게 떠나서는 결코  되는 것이다. 결코 그래서는  되는 것이다. 간신히 약속 장소로 향해 소대원들을 만났지만 차마 그들과 시간을 보낼  없었다. 그들과의 시간은 귀했지만 정말 미안하다고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다고 양해를 구하며 얼마간의 식사비를 건네주고 다시 숙소로 향했다. 부대에 허락을 구하고, 근처에 있는 몇몇 동기들과 차편을 마련해 자정이  되어가는 시간  아이의 빈소로 향했다. 늦은 밤이었고, 출근앞두고 하루 만에 오가기는  거리였지만 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새벽이 되어 빈소에 도착하니 소식을 듣고 찾아온 동기들과, 여러 개의 화환이 비통함 속에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영정사진   아이를 보니 마음이 다시 무너졌다. 잠깐의 인연으로 맺어진 마음이  정도일진대 부모님과 가족들의 마음은 감히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전역했던 그의 동생과 꿈에도 생각 못한 장소에서 넋이 나간채로 마주했고, 가늠할  없는 슬픔을 겪는 그에게 위로조차 건네기 어려웠다. 동기들은  자리에 침울하게 모여 있었고, 군복을 입은 동기들도 있어 우리를 알아보시고 오신  아이의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이렇게 찾아와 주어서 많이 고맙다고. 우리 아이는 장군이 되고 싶어 했다고. 장군이 되어 칼을 차고 천하를 호령하고 싶어 했는데  칼이 결국 비수가 되어 아비의 가슴에 꽂혔다고 말씀하셨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형용할  없는 슬픔과 참혹함에 가슴이 서늘하다. 무엇이  아이를 그렇게 빨리 떠나게 만들었을까.  아이는  피어 보지도 못하고 아름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야 할까? 아마 평생 그를 잊을  없을 것이다. 조문을 마치고 밤새도록 차를 타고 돌아오니 출근시간이었다. 출근을 하니 행군이 계획되어 있었고, 피곤함과 슬픔이 뒤섞인 마음으로 밤늦도록 산을 걸었다. 그래도 일상이 있어 조금이나마 슬픔이 희석될  있었다.

 그날까지 살아오며 직접적으로 알던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처음이었다. 그것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비통함과 어떤 말로도 형용할  없는 슬픔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초임장교 집체교육 실습에 구대장으로 파견되었고, 사령부에서 2주간 근무하며 같이 파견된  선배를 알게 되었다. 1 선배였던 그는 유쾌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고, 함께 근무하며 생긴 친분으로 파견기간이 끝난 뒤에도 자대로 돌아가 종종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들은 그의 소식은 소대장에서 참모로 직책이 바뀌었다는 소식이었다. 잘된 일이라고  있을 장기 복무에도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며 연락주고받은 얼마  상급부대에서 하달된 사건사고 문서를 접했다. 어느 부대의 무슨 직책을 맡던 사람의 극단적 선택에 관한 소식이었다. 안타까워하며 기사를 읽고 있는데, 순간 싸늘한 기분이 들어 기사를 곱씹어 보니  부대는 그가 근무하는 부대였고 직책은 얼마 전에 그가 새로 맡았다고 알려준 바로  직책이었다.  순간 심장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믿기지 않았고, 믿을  없었고, 믿고 싶지 않았다. ? 도대체 ? 속으로  없이 ''냐는 물음을 되물으며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그와 같은 부대에 근무하던 후배에게 연락해봤지만 후배의 눈물 섞인 목소리를 접하자 되물을 필요도 없음을 깨달았다. 마땅히 그의 빈소에 찾아갈 명분도 없었고, 찾아갈 여건도 되지 않아 결국 빈소에는 가지 못했다. 며칠 동안 그의 SNS 찾아 들어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는 글을 읽고, 그의 누나가 추모객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읽으며 그렇게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밖에   있는 일이 없었다.

 군 생활 가운데 두 번의 젊은 죽음을 겪었다... 세상의 어떤 말로, 그 어떤 것으로 그것을 위로할 수 있을까. 짧은 인연이었지만 평생 그들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후 군생활 간 틈틈이 재직 군인의 근무지 조회 사이트에서 그들의 이름을 검색하고 그들의 SNS에 들어가곤 했다. 무엇을 바란 건 아니다. 그들은 더 이상 검색이 되지 않았고, SNS에는 남은 사람들의 그리움이 담긴 인사로 그들의 부재만 명확해질 뿐이지만 그들의 흔적이 없어지는 게 싫었다. 누군가 그들을 그리워하는 흔적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들의 가족분들에게 죄스러울 정도로 작고 꺼내기도 조심스러운 아픔이겠지만 나의 마음에도 지울 수 없는 상흔이 하나 남았다.  

 지난날에 관하여는  이상 어떤 가정도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내가   있는 일은 무었을까. 나는 주어진 날들을 기약하고자 한다. 내게 허락된 시간들을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피우며 살아가는 .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 따뜻한 기운을 나눠주는 . 그들의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고 응원하는 . 그것이 내가   있는 최소한이자 모든 것일 것이다. 조금만  욕심을 내자면 바라본다.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진심을 담은 온기를 전하는 글을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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