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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Dec 14. 2022

자기만의 방

나의 쓸모

 소대장 시절 개인 사무실은 고사하고 부대에 개인 자리도 없었다. 중대 행정반 한쪽에 컨테이너로 분리한 공간에 중대장실이 있었고, 행정반에는 행정보급관 자리 하나와 컴퓨터가 비치된 책상 세 개가 있어서 이를 중대 간부들(소대장 3, 부소대장 4-5명)과 행정 계원들이 번갈아가며 사용했다. 개인 짐은 잠금장치가 되어있는 캐비닛에 보관하고, 소대원 면담 등 개별 공간이 필요할 때는 중대장실이나 교관 연구실을 이용했다. 옷을 갈아입거나 근무 취침등 휴식 시 여군 여군무원 휴게실을 이용해서 필요성 부분에 있어서 부족함은 없었다. 당시 특별히 개인 공간의 부재를 인식하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탄약 소대장이라는 직책상 대부분의 시간을 야외에서 보내느라 개인 공간을 이용할 여력도 시간도 없었다. 

 변화는 어느 날 찾아왔다. 전임 중대장의 전역으로 잠시 중대장 임무를 맡으며 '중대장실'이라는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없을 때는 몰랐지만, 혼자 쓰는 공간이 생기자 생활의 질이 개선되었다. 그동안 공용 pc를 사용하며 다른 간부의 필요를 살폈는데 전용 pc로 업무 하니 편했고, 중대원 면담일지를 작성하기도 좋았다. 사무실에 필요한 물건을 갖다 두고 언제든 사용하고, 간부들과 회의도 하고, 중대원 상담도 하며 그곳을 누렸다. 옷을 갈아입으러 일부러 여군 휴게실까지 갈 필요도 없는 편안함은 덤이었다. 과히 나쁘지 않았다. 얼마 뒤 후임 중대장이 오고, 나 역시 부대를 이동하며 곧 공간을 내주었지만 그동안 나의 흔적으로 채웠던 공간을 비움에 얼마간 아쉬움도 있었다. 

 차기 보직은 사단 예하 정비대대 운영 장교의 행정직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니 나는 당시 (내심은) 개인 공간을 원했다. 운영과는 지휘통제실 옆 통합된 하나의 사무실을 간부들과 행정 계원들이 함께 사용했고 각자의 지정석이 있었을 뿐 개인 공간은 따로 없었다. 컴퓨터로 업무 외의 것을 하지 않지만(군의 컴퓨터는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아 행정 작업 말고는 따로 할 게 없다;) 모두가 컴퓨터를 항시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부담이었고, 사무실이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라는 점이 가장 불편했다. 항상 사람들이 오가는 지휘통제실은 당시 마음 상태에서는 수시로 누군가 '들이닥치는' 곳이었고 안정된 공간이 아니었다. 대대장님, 대대 간부들, 새로 전입 온 인원들 및 사단 간부들, 때때로 외부 손님들까지 불특정 다수의 인원들이 수시로 방문하는 일은 퍽 불편했다. 나는 기질적으로 예민했고 낯을 가렸으며 군 생활에 지쳐 마음이 평온하지 못한 날이 많았다. 감정의 기복이 널을 뛰며 저 깊숙이 마음이 가라앉아 있을 때 누군가를 마주하는 일이 업무보다 부담이었다. 특히 그가 낯선 사람일 경우에는 더욱 심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예의를 갖춰 (반갑게) 인사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마음을 숨긴 채 간신히 웃는 낯으로 인사를 하는 일이 버거웠다. 어느 예리한 신입 간부는 단번에 나를 꿰뚫어 보았다. 어느 회식자리에서 그는 말했다. 이곳에 처음 전입 온 날 지휘통제실에서 마주한 운영 장교님의 표정이 굉장히 불안해 보였다는 그의 발언에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진심으로 상대를 걱정하는 말에 순간 울컥했으나 간신히 평온한 얼굴로 '그러셨군요'라고 대답하며 넘어갔다. 그가 나보다 하급자여서 였을까, 나라는 사람의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필요한 것은 개인 공간이었다.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공간. 마음을 가다듬고 타인을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어느 날의 기억이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지만 그날은 마음이 유난히 힘들었다. 누구도 마주할 자신이 없는데 혼자 있을 곳이 없었다. 결국에는 화장실로 갔다. 그곳에 문을 잠그고 오래도록 있었다. 한참을 마음을 다독이고 숨을 고르고 겨우 용기를 내서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태연한 얼굴로.. 아무도 내가 오래도록 마음을 다독이고 온 사실을 알지 못해서 다행이지만 조금 쓸쓸했다. 

 자기만의 방을 원한 이유 중 하나가 앞서 언급했듯 내면의 숨을 고르기 위한 본능이었다면 하나는 결이 다른 '자아실현'의 문제였다. 나는 '운영 장교' 보직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나의 보직이 자랑스럽지 않았다. 전 부대에서 이곳으로 올 당시 부대 이동 그 자체를 최우선으로 고려했고(전 부대에 너무 오랜 시간 머물렀다.), 자가에서 가까운 곳인지를 고려해 결과적으로 내가 수락한 보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후회되었다. 부서장이나 중대장을 하고 있는 동기들이나 사단 사령부에서 근무하는 동기들 혹은 나와 비슷한 연차의 동료들을 보며 사단 사령부도 아닌 예하 대대에서 부서장도 맡고 있지 않은 내 위치를 가늠했다. 스스로 느끼기에 작았고, 타인의 눈에도 작게 비칠까 봐 신경 쓰였다. 여군으로써의 나의 모습도 의식되었다. 조직에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나 자신과 여군 후배를 위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당시 두 가지 마음이 공존했다. 곧 떠날 조직이니 이곳에서 차지하고 있는 나의 지위가 크게 중요치 않다고 여기는 체념에 가까운 개인의 마음과, 지금 이 보직을 하는 것이 이익일지 손해일지를 계산하는 육군 대위로써 마음. 육군 대위로써의 마음도 희미할지언정 꺼지지 않고 마음 한편에 남아서 오히려 괴로웠다.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배우며 얼마나 성장할지를 바라보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지만, 나는 결국 계급과 연차에 따른 계산에 더 비중을 두었다. 나는 어느덧 나의 보직을 마음에서 밀어내고 부정했다. 내 마음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에게 자기만의 방은 '잉여'의 두려움을 부정하는 상징이었을 것이다. 조직 내 개인의 위치를 굳건히 하는 어떠한 상징과 같은 존재. 

 사실 부대 사정에 따라 부서장에게도 개인 사무실이 주어지지 않거나, 상급부대에 근무하고 계급이 높아도 보직에 따라 개인 사무실이 없는 경우도 많다. 또한 개인 사무실도 번듯하고 좋은 어떤 공간이라기보다 부대에 따라 낡았거나 혹은 건물의 한 공간을 컨테이너 등의 가벽으로 살짝 분리해둔 정도도 많으니 물리적 공간의 좋음으로 인해 그곳을 원했다기보다는 스스로 부족하다 여겨지는 나를 대신 증명해줄 어떤 상징으로써 그것을 원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전역을 앞둔 내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원한다면 보직변경을 요청할 수 있었을 것이나 그 후의 일은 나의 소관이 아니니 경우의 수를 고려해야 했다. 받아들여질지 문제, 받아들여진다 해도 새 보직이 안정될 때까지 겪게 될 혼란과 혹 주변 끼칠 피해, 가장 최악은 새롭게 주어진 일을 잘 못했을 때 찾아올 비난과 이것이 무엇을 위함인지 냉정하게 판단이 안 되는 마음이 뒤섞였다.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가장 현명한 선택지는 지금 주어진 일을 완벽하게 잘 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부서장은 나보다 연차도 오래고 인품도 좋았고 진급을 앞둔 선배였기에 분명히 배울 점이 많을 것이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다 보면 지금 이 조직에서는 아니어도 분명 나에게 다시 새로운 기회가 찾아올 것이고, 군과 나와의 인연은 끝을 향해 가고 있으므로 나는 지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때가 되면 떠나는 것이 맞다. 나는 그렇게 나의 여러 마음들을 눌러주고, 다독이고, 격려하며 주어진 일을 하며 군생활의 끝을 기다렸다.


덧. 그 시절 나의 마음을 모른 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 글을 썼다. 그것이 그 시절의 나에게 건네는 가장 따뜻한 위로이므로. 

글을 쓰는 지금도 나에게 물리적인 '자기만의 방'은 없다. 심리적인 '자기만의 방'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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