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그녀들

영감을 주는 여자들

by 수진

가끔 핸드폰에 있는 연락처 목록을 훑어볼 때가 있다. 너무 많은 연락처는 관리도 어렵고 감당이 안 되어 필요에 의해 맺어진 인연들은 더 이상 인연이 이어지지 않으면 연락처를 지우곤 하는데, 친구들의 경우 연락이 희미해져도 선뜻 지우기 어려워 대부분 연락처를 남겨두는 편이다. 며칠 전 문득 연락처를 검색하며 친구들의 현황을 스캔하다가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구 H가 눈에 들어왔다. 대학시절 도쿄에서 유학하며 알게 된 H와는 안 친하다 할 수는 없지만 단둘이 만나거나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관계는 아니었고, 각기 친한 친구들의 교집함으로 가끔 얼굴을 보던 관계였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8년 전이니 드물게 이어지던 만남 이후로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왠지 H는 아직 일본에 있을 것 같아 갑자기 연락해보고 싶었다.

도쿄에서 유학하던 당시 만났던 친구들은 나처럼 어학연수생 신분은 드물었고 워킹 비자를 받아 일본에 왔거나 대학 진학까지 고려해 유학 온 친구들이 많았다. H도 대학입학을 준비하던 유학생 중 하나였다. 당시에도 친구들 중 일본어 실력이 뛰어났고 일본에 오래 머물기를 희망했던 H는 일본 내 외국어로 독보적인 국립 외국어 대학에 진학해 공부하고 싶어 했다.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며 일본 대학 수험 준비(우리나라의 수능과 같은 제도)를 하며 지내고 있었다. 잠시였지만 겪어본 일본 유학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학교 수업을 제대로 소화하기에도 빠듯한데,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하니 몸이 힘들었고 그러다 보면 원래 목적인 학업에 소홀해지기 쉬웠다. 아르바이트 시급은 한화 1만 원 전후로 당시 물가로 생각하면 적지 않았지만, 생활비 지출 또한 그에 상응하게 많았으므로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서 돈을 벌어야 생활이 유지되었다. 부모님께 경제적 지원을 받는 친구들도 일부 있었지만, 유학생들은 대부분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1년 계획으로 일본에 왔던 나는 끝이 보이는 시간을 보내며 그런대로 즐겁게 지낼 수 있었지만, 일본어를 배우고 수험준비를 하고 대학교나 전문학교에 진학해 학업까지 마치려면 최소 5년에서 길게는 10년 가까이 소요되는 유학생활을 이어가는 친구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어느덧 대학 입시의 날이 다가왔다. H는 희망하던 대학교 입학시험에서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했고, 성적에 맞는 대학교를 택하기보다 재수를 하며 대학교 입학을 다시 준비하기를 택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외국어 대학교에 진학해 일본에서 공부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예정대로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 후 간간히 연락하던 친구들을 통해 H가 결국 원하는 대학교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8년 전 한 친구의 결혼식을 계기로 만났던 H는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거나 진로 고민을 하고 있었고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근황이었다.

나의 문자에 반갑게 답을 해온 H는 예상대로 아직 일본에 있었고, 도쿄를 떠나 현재는 내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도시에 살고 있었다. 그곳을 불과 얼마 전 여행했던 나는 다시 이어지는 우리의 인연에 놀랐고, 심지어 그는 내가 여행 중 묵었던 호텔에서 1분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살고 있었다. 현재는 대학교수가 되어 벳부(別府)의 한 대학교에서 일본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그의 근황에 나는 전율이 일었다.

다음 달에 일이 있어 내가 있는 도시를 방문할 예정인 H와 곧 만나기를 기약한 뒤, 나는 한동안 그의 일에 사로잡혀 지냈다. 오랜 시간 꿈을 갈망하며 포기하지 않고 성실하게 노력해 마침내 꿈을 이루는 일을 깊이 사랑한다. 그간의 일들은 만나서 들어봐야겠지만 18년 전 그와 처음 만난 그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성실하게 노력했을 그의 시간이 떠올라 울컥했고 뭉클했다. 타국에서 홀로 지내며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어가며 스스로의 삶을 지탱해 학업에 매진했을 그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뜨거웠을지, 얼마나 많은 포기하고 싶던 순간들을 이겨냈을지, 그럼에도 마침내 원하던 공부를 모두 마치고 자국민도 쉽지 않았을 교수직에 오른 그가 너무 대견하고 멋져서 온 마음으로 격려하고 싶어졌다.

살다 보면 가끔 생각지도 못한 소식과 함께 나타나는 친구들을 볼 때가 있다. 신춘문예 수상자 대상명단에서 강렬하게 등장하더니 현재 뮤지컬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대학교 친구, 아이 둘을 키우며 임용고시를 준비해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되더니 엄마로서 수험생활하며 선생님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나는 공부하는 엄마다'는 책으로 출간해 들고 나타난 같은 과 친구, 전역 후 향기 공방을 차리며 뜻밖의 행보를 하고 있는 군 동기... 때로는 그들의 삶을 통해 나의 삶은 이대로 괜찮은가 돌아보기도 하지만, 나 역시 현재의 나의 삶이 대부분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졌기에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친구들의 행보를 지켜보게 된다.

고요하고 평온한 일상은 지극히 감사해야 할 일이고, 나 역시 주어진 일상을 성실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가끔 일상의 지나친 고요와 반복에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무감각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간간히 마주하는 친구들의 소식은 단비와 같이 내게 긍정적 자극을 준다. 그들의 오래전 처음 시작하던 모습을 기억하던 나로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성실하게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을 삶의 치열함을 알기에 그 감정은 부러움이나 질투보다는 존경에 가까운 것이다. 닮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 뜨거움이다. 겉으로는 평온할지라도 내면에는 그토록 강렬한 뜨거움을 품고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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