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영화라고 하면 왠지 촌스럽고 지루할 것 같습니다.
이젠 나이도 제법 먹은 저이기에 그 옛날 감성이 기억날까 싶기도 하구요.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영화와 담을 쌓은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올여름휴가가 끝날 즈음, 우연찮게 중경삼림(1995년 개봉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후 느낀 여운과 감정을 잊지 않으려 영화리뷰를 적습니다.
영화 줄거리 (스포 있음)
ㄴ조금 길지만 그래도 읽고 후기를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내용을 잘 아시는 분은 바로 후기로!
중경삼림 두 번째 에피소드.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테이크아웃 음식점)에서 사장의 사촌조카인 페이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매일 저녁, 같은 시간에 제복 입은 경찰 663(경찰번호)이 찾아옵니다.
663은 항상 같은 메뉴를 주문합니다.
사장은 왜 매번 같은 메뉴를 주문하냐고 다른 것도 먹어보라고 663에게 묻습니다.
663은 그 음식을 여자친구가 좋아한다고 하네요.
그러던 어느 날 663은 '블랙커피'를 한 잔 달라합니다, 연인과 이별을 한 것이죠.
그리고 며칠 뒤,
식당에는 스튜어디스 유니폼을 입은 여자가 방문해 663에게 전해주라며 편지 한 통을 남깁니다.
663의 전 여자친구였죠.
식당 사장과 직원들 모두 그 편지를 돌려보고, 이제 페이의 차례입니다.
편지에는 이별통보와 함께 663의 집열쇠가 들어있습니다.
663은 그날 저녁도 식당을 찾아 블랙커피를 시킵니다.
페이는 전 여자친구의 편지를 663에게 전해주려 하지만, 663은 커피를 다 마신 후 식당에서 보관해 달라며 자리를 일어납니다.
며칠 뒤
페이는 발칙하게도 편지 안의 열쇠로 663의 집을 몰래 들어갑니다.
다 찢어진 수건
바짝 말라비틀어진 비누
남자 혼자 사는 집이니 남아난 것이 없죠.
663이 알던 모르던 페이는 매일매일 집을 치우고 청소를 합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된다고, 청소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나중엔 커튼, 이불보, 식탁보 마저 교체해 버립니다.
우렁각시 같은 날들이 얼마나 지났을까?
페이는 663의 침대에서 기다란 머리카락 한 올을 발견합니다.
그리곤 수도꼭지를 전부 열어 집안 가득 물바다를 만들어놓죠.
663은 알 수 없는 기분에 황급히 집으로 달려갔다가 물바다 난장판이 된 것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크게 놀라지 않고 덤덤히 집을 치우는 663.
그냥 '수도꼭지를 안 잠갔나?' 하고 의아해할 뿐입니다.
그러던 중 집 문 앞에 불쑥 페이가 찾아왔고 둘은 깜짝 놀랍니다.
그러나 이내 왜 왔는지, 어떤 영문인지는 중요치 않게 두 사람은 방안 소파에 앉아 잠시 시간을 보냅니다.
식당에서 페이가 틀어놓던 'California Dreamin - The Mamas & The Papas'를 들으며 말이죠.
페이는 묻습니다. 이런 노래는 안 듣지 않냐고
663은 전여자친구가 두고 간 cd라고 내뱉죠.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페이가 집청소하며 들으려고 가져갔다가 깜빡 잊고 놓고 간 cd였거든요.
그날 밤
663은 새삼 집안에 바뀐 비누, 수건, 인형 등 을 하나하나 만져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립니다.
이제는 나도 달라져야지 하고 말이죠.
그리고 며칠 뒤
663은 드디어 자신의 집에 무단침입해 있는 페이를 발견합니다.
663이 무언가 말을 걸기도 전, 페이는 도둑고양이처럼 순식간에 663의 눈에서 달아납니다.
663은 식당을 찾아가 페이를 찾고,
고맙다는 인사말과 함께 내일 저녁 8시에 '캘리포니아' 술집에서 기다리겠다며 데이트를 신청합니다.
다음날
663은 아직도 집안에 남아있는 전 여자친구의 흔적을 모두 정리하고, 옷장에서 한 셔츠를 꺼내 입습니다.
그 옷은 포장지에 싸여있던 것을 페이가 꺼내 걸어둔 것이었습니다.
약속시간에 조금 일찍 도착한 663은 페이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페이는 오지 않고..
한참의 시간이 흘러 663을 찾아온 건 페이의 삼촌(식당사장)이었습니다.
사장은 페이가 캘리포니아로 떠났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페이의 편지를 전해줍니다.
633은 집에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가 편지를 가게 밖 종이 쓰레기더미에 던져버립니다.
얼마 후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빗줄기가 거세지자 663은 다시 그곳을 찾아 편지를 집어 들고 젖은 편지를 열심히 말립니다.
편지에는 페이가 그린 항공권이 그려져 있습니다.
출발지는 빗물에 번져 보이지 않았고 출발시간은 약속일로부터 1년 뒤 저녁 8시, 목적지는 공란입니다.
1년 뒤..
페이는 '캘리포니아' 술집에서 스튜어디스 제복을 입고 앉아있습니다.
작년 오늘, 약속시간에 늦을까 45분 먼저 도착해 있다가 훌쩍 캘리포니아로 떠날 결심을 한 바로 그곳이었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해 보이지만 누구도 페이를 만나러 오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생각에 잠겼던 페이는 술집을 나섭니다.
그렇게 돌아가던 중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의 셔터사이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보이고..
호기심에 셔터를 올려보니 663이 내부수리에 한창입니다.
1년 만의 재회
페이의 얼굴은 놀란 토끼가 되고.
663 역시 잠시 놀란 얼굴을 보이지만 어느새 특유의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페이를 바라봅니다.
663은 삼촌으로부터 가게를 인수해 이틀뒤에 개업한다고 말하죠.
페이는 내일 멀리 떠난다고 하구요.
663은 해외로 나가면 내게 편지를 보내달라고 합니다.
페이는 코웃음 치죠. 어차피 안 볼 편지를 왜 쓰냐며
663은 가게 뒤편에 걸려있던 페이의 편지를 꺼내와 보여줍니다.
출발지는 물에 번져 보이지 않고, 목적지가 공란인 편지였죠.
663은 페이에게 목적지가 어디였냐고 물어봅니다.
페이는 편지를 다시 적어주겠다며 종이와 펜을 꺼내 항공권을 그리기 시작하고..
목적지를 어디로 하면 좋겠냐는 페이의 물음에
663은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라고 말하며 영화가 끝이 납니다.
후기
영화에서 가장 놀랐던 것은
663과의 약속장소에 페이가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동안의 우렁각시 행보를 보면 백번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페이는 홀연히 캘리포니아로 떠나버린 것이죠.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참 동안 페이의 결정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사랑은 이루어져야 한다고만 생각하는 주의가 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페이가 나타나야 하고 그래야만 완결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사실 페이는 연인으로서 663을 접한 적이 없습니다.
엉뚱하고 즉흥적으로 663의 집을 몰래 드나든 것을 시작으로
자신의 안에서만 663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고 663의 모습을 상상했을 뿐이죠.
거리낌 없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순수한 사람에게 그동안 꿈꿔온 사랑이 현실로 다가온다는 것은
기대 못지않게 걱정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감정이 진정 사랑인지도 의심스럽고
가벼운 호기심으로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상상한 모습과 실제가 다르면 어떻게 하지? 하고 말입니다.
페이에게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1년 뒤를 약속하는 편지를 남겨놓았죠.
처음 663의 집 문을 열었을 때처럼 가히 페이 다운 결정이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집안의 변화에서 보이는 663의 반응입니다.
집이 자기도 모르는 새에 하나둘 바뀌어 간다면 충분히 공포스러운 상황일 것입니다.
그러나 663은 무심한 건지 둔감한 건지 크게 놀라지 않죠.
귀여운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장난을 치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까요?
걱정 없이 변화를 즐기고 받아들이는 것 같았습니다.
불쑥 집을 방문한 페이에게 'California Dreamin'를 들려줄 때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는 탐정 같았지요.
기다렸다듯 페이를 찾아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데이트신청을 하는 것을 보면 그동안 663도 페이를 향한 마음을 키워간 것은 아니었을까요?
세 번째, 1년 뒤 재회한 663과 페이의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까요?
출발지를 몰랐던 남자는 언젠가 돌아올 그녀를 기다리며 아예 식당을 인수해 버렸고,
목적지를 몰랐던 여자는 1년이란 시간이 지나 다시금 출발지로 돌아왔습니다.
결국 같은 출발지에서 만나 이제야 목적지가 어딘지 알게 된 두 사람.
하지만 목적지를 안 것만으로 그곳에 함께 도착하리라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상상입니다.
누군가는 중간에 경유를 할 수도, 누군가는 티켓을 취소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사랑이 애절한 것인가 봅니다.
두 주인공의 순수한 모습과 이제는 어른이 되어버린 저 자신을 돌아보니 서글픈 기분입니다.
물질에 연연하지 않고 마음의 크기로만 사랑을 하던 그때의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요?
바삐 사는 것을 핑계로 감정의 문을 닫고 산지 오래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삶이지만, 가끔은 오늘처럼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 이루어지지 않았던 첫사랑이,
더 깊어져만 가는 여름밤이네요.
그럼 며칠만 더 감정에 취해 있겠습니다.
+
알고 보니 페이가 그린 항공권에서
출발지는 홍콩이고
목적지는 비에 번져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항공권 보는 법을 몰라 그냥 제 마음대로 해석했네요 ㅠㅠ
저는 출발지가 캘리포니아 술집이고 목적지는 공란인 줄 알았습니다;;
(감독이 원래부터 명확히 보이지 않도록 의도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출발지와 목적지가 불분명한 것이 결론입니다. 이 부분을 관객의 상상으로 남겨두는 것도 멋진 연출이네요..)
페이는 아무 말 없이 '캘리포니아'를 다시 방문합니다.
663이 자기를 찾아와 주기를 바라면서 말이죠.
하지만 약속장소에 663은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이번에도 663의 문을 연건 페이였네요.
처음 리뷰를 적을 때만 해도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페이는 손에 잡히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
663은 경찰이라는 직업에 성격도 무던하고 심심하게 사는 사람이었으니깐요.
663의 집에서 페이가 도망쳐버린 것처럼 말이죠.
1년의 시간이 흘러
스튜어디스 복장의 페이와 경찰제복을 벗고 식당주인이 된 663,
사뭇 달라진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서로의 입장이 바뀐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페이가 663을 발견했을 때 663은 도망치지 않았죠.
둘 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방법이 달랐을 뿐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기억하고, 기다리고 있었다구요.
1년 전 데이트를 했다면 불 같이 활활 타서 끝났을지도 모를 사랑이,
이제 더 크고 애틋해져서 돌아왔네요.
페이의 선택이 옳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