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술이 세무사 이야기
매서운 바람에 몇 분도 서 있기 힘든 날씨
쌓인 눈을 저벅저벅 밟으며 어디론가 향하는 남자가 보였다.
추위를 막기 위해 옷을 단단하게 여미고 마스크까지 써, 누구인지 쉽사리 알 수는 없었다.
그의 눈은 무언가에 골똘히 빠져있었다.
곧이어 그가 들어간 건물은 세무서였다.
점퍼의 후드를 내리고 마스크를 벗은 그는,
바로 '술술이 세무사'였다.
사뭇 진지해 보이는 표정.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 버튼을 눌렀다.
버튼 옆에는 '재산세과'가 프린트 되어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는 재산세과 푯말 앞에서 긴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곤,
입을 굳게 다물고 걸음을 옮겼다.
술술이는 '상속세 해명안내문'을 받고 이를 대응하기 위해 세무서를 찾은 것이다.
조사로 연결되지 않아 다행이지만, 조사에 준하는 해명요청이었기에 큰 차이는 없었다.
해명의 쟁점은 상속채무로 공제받은 자녀의 채권.
곧 별세한 아버지에게 자녀가 생전에 대여한 채권의 사실관계였다.
특수관계자 간의 채무인 만큼 해명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상속세 신고부터 이와 관련 충분한 안내를 했었다.
그러나 신고일로부터 6개월이 더 지나다 보니 기억이 희미해져 다시 상속인을 만나 자료를 요청하고 며칠 동안 정리를 했다.
소천일로부터 8년여 전,
망인은 단독주택을 구입했고 그 과정에서 부족한 자금 약 2억 원이 자녀의 통장에서 송금되었다.
해당 2억 원의 출처는 자녀가 배우자로부터 빌린 5천만 원, 청약해지금 5천만 원, 은행 대출금 1억 원이었다.
여러 번의 전화통화로 목소리가 친숙한 담당 조사관인 반원과 팀장님이 함께한 회의실.
앳된 반원을 배려해서 노련한 팀장님이 합석한 모양이다.
가벼운 인사와 함께 그는 정리해 온 자료를 제출했다.
자료의 양이 적지 않아 그 자리에서 모두 검토하기는 어려운 상황,
대신 따로 정리한 해명요지를 건네며 2억 원의 출처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다.
그때였다. 이야기를 듣던 팀장님의 눈이 반짝였다.
"네, 자금출처는 잘 이해했는데, 차용증은 썼나요?"
사실 2억 원 출처보다 중요한 것은 해당 금전거래가 '증여인지, 차용인지의 판단'이었다.
증여로 본다면 망인에게 증여세 및 가산세가 부과되고,
채무가 아니므로 상속재산에서 공제받을 수도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차용증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입안에서 마른침이 고였다.
꿀꺽.
"차용증은 없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해명이 끝나는 것일까
"제가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팀장님과 시선을 마주한 채, 정적을 가르는 비장한 목소리였다.
"어느 날 저희 아버지가 전화를 하셔서 '아들아 지금 부동산 잔금을 치러야 하는데 돈이 급히 필요하다. 2억 원 좀 빌려줄 수 있겠니?'라고 하셨을 때"
말을 멈추고 팀장님과 반원을 번갈아 바라보는 술술이
"'아버지 일단 차용증부터 쓰셔야 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먼저 가까운 공증 가능한 사무실로 예약을 잡으시고요. 지금은 바쁘니 서류 작성이 완료되면 인감도장과 인감증명서 지참하셔서 그곳에 뵙기로 하죠.'라고 말하는 자녀가 세상에 있을까요?"
종이컵에 담긴 물 한 잔을 들이킨 뒤 그는 말을 이어갔다.
"자식이 아내의 돈은 물론, 은행 대출에 청약까지 해지해가며 고령의 아버지에게 증여를 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추후 상속이 예정되었기에 이를 아버지에게 빌려드린 것이 합리적인 판단일 것입니다."
팀장님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였다.
"솔직히 요새 차용증이라는 건 증여를 숨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 마련이지, 오히려 실제 부모자식 간에 돈을 빌릴 때는 차용증을 쓰지 않는 것이 정상적인 가족입니다."
그랬다.
가족이 당장 돈이 급한 상황에서 어느 부모, 어느 자식이 차용증부터 내밀겠는가?
유교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돈이 급한 아버지 앞에 차용증부터 들이미는 아들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차용증에 대해 물어올 줄은 예상치 못해 잠시 당황했지만
순발력과 개인기로 원맨 토크쇼를 펼쳐낸 술술이 세무사였다.
회의실을 나서며 팀장님이 다문 입술을 조용히 열었다.
"샤프한 세무사님이 오셨네..."
논리가 먹혀든 것일까.
그 한마디가 짜릿하게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