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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술북스 Apr 18. 2021

내 행동이 갑질인 줄도 모르고

뼈 때리는 자기계발서를 읽고서

뼈 때리는 자기계발서를 읽었다. 아니, 정확히는 오디오북으로 들었다. 제목이 너무 기니까 여기서는 《심플화려》라고 하자. 이 책은 디자이너와 원활하게 소통하려는 클라이언트에게 유용한 조언을 해주는 책이다.



좋은 디자인에 정답은 없어도 원칙은 있다. 디자이너가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면 클라이언트에게도 그것이 있지 않을까? 최종에 최최종을 거쳐 진짜 최종 디자인 작업물이 만족스러우려면 클라이언트는 무엇을 지켜야 할까? 나는 출판편집자로 일하면서 프리랜서 북디자이너에게 책 표지와 본문 디자인은 부탁하곤 한다. 《심플화려》가 나에게 말하고 일깨워준 것은 내가 원칙을 지키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 나 디자이너님께 갑질하고 있었구나.

내가 회사에서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은 아니고, 어차피 경력도 얼마 안 되고 능력도 부족하고 나이도 어리고 사장으로부터 “아랫것들” 취급이나 당하는 엄청난 사람이지만,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억지로 낮추면서 출판사의 관행을 어쩔 수 없는 척 관성적으로 따르며 디자이너와 소통하고 있었다.


말이 소통이지 사실상 통보였다. ‘표지에 뫄뫄 부분을 뭐뭐하게 수정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은 사실상 ‘수정하십시오!’였고, 그 와중에 책 제목처럼 “심플하지만 화려하게” 혹은 ‘다른 책과 차별화되지만 너무 튀지 않게’ 등등 헛소리만 하지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언젠가 이런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이번에 작업한 책 디자인비는 언제 보내주시나요?” 돈 관련된 문제는 사장과 총무부가 처리하고 있었고, 책이 인쇄되어 나온 후 시간이 좀 지난 시점이었기에 나는 당연히 회사에서 디자이너에게 돈을 보냈으려니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나는 사장에게 디자이너로부터 연락이 왔다고 이야기했고, 이후 사태는 어찌저찌 잘 처리된 듯했다. 하지만 그때도 그렇고 언제나 사장이 입에 달고 다니는 소리인 “회사에 돈이 없는데…”라는 말이 뇌리에 남았다. ‘회사에 돈 없음!’을 디자이너가 양해해야 하는 걸까? 디자인비 지불이 조금 늦어져도 괜찮은 걸까?


그때 참 죄송스럽고도 다행스럽게도 디자이너는 유리멘탈인 나에게 불같이 화를 내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심플화려》를 듣고 나서 돌이켜보면 정말이지 식겁할 만한 사건이었다. 디자인비를 언제 어떻게 얼마나 보낼지 계약서를 미리 작성했더라면,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진 않았을 텐데.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지금껏 디자이너와 일하면서 계약서를 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내가 느끼기에 출판계에는 특히 작은 출판사일수록 계약서 없이 디자인을 의뢰하는 관행이 있는 것 같다. 계약서가 없으면 디자인비 지급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것은 물론 심한 경우 디자이너가 일한 만큼의 돈을 못 받는 일도 발생할 수 있다(정확히는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계약서가 있어야만 좀더 확실하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이어서 또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지금껏 야근 수당을 받아본 적이 없다. “회사에 돈이 없는데…” 어휴, 한숨. 물론 돈이 없기에 사장도 나에게 야근을 강요하지 않고 나도 억지로 야근하려 하지 않는다(당연한 소리지만, 일을 적절히 하는 만큼 퀄리티도 적당히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일이 많아질 때, 술자리를 마련하여 번역자나 저자를 접대할 때, 열심히 구상하고 작성한 제목안, 홍보 카피, 보도자료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계속 다시 써야 할 때(하지만 마감은 변함이 없을 때), 야근 혹은 주말 근무를 할 수밖에 없다.


《심플화려》에서는 프라이어리티(priority) 비용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나는 이걸 야근 수당 비슷한 거라고 생각한다. 클라이언트가 정말 급해서 당장 디자인 작업물이 필요할 때 디자이너에게 다른 거 제쳐두고 자신의 일 먼저 처리해달라고 요구하면서 지급하는 추가 비용이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일정이 흐트러지는 상황에서 디자이너는 밤을 꼬박 새우거나 휴일을 몽땅 날려버려야만 한다. 그러니 클라이언트는 추가로 비용을 지불해야 마땅하다.


나는 지금껏 이 프라이어리티 비용에 관해 디자이너와 상의해본 적이 없다. 그저 회사의 상황을 들먹이며 ‘어쩔 수 없다’ ‘정말정말 죄송하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달라’는 식으로 독촉만 했을 뿐이다. 아니, 애초에 프라이어리티 개념조차 이 책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알게 됐다.


내가 너무 당연하게 야근 수당을 못 받으며 일했기 때문일까? 나는 프라이어리티 비용을 디자이너에게 줘야 한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다. 디자이너의 상황은 고려하지 않은 채 회사의 상황만 양해해달라고 강요하는 갑질이었다.


북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의뢰하는 건 출판사지만, 북디자이너가 상대해야 할 클라이언트는 비단 출판사만이 아니다. 또 하나의 클라이언트는 바로 저자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저자가 있다. 표지 디자인을 전적으로 출판사(디자이너)에 맡기는 저자와, 하나하나에 깐깐하게 간섭하는 저자.


깐깐한 게 꼭 나쁘지만은 않다. 이 책은 내 거야! ‘아무개 지음’이라고 자기 이름을 달고서 나오는 책에 저자는 애착을 갖기 마련이다. 만약 20대 여성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같은 여성과 공감하는 에세이를 쓴다면, 저자가 원하는 대로 만든 책을 독자들도 원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저자와 예상독자가 일치하지 않을 때다.


만약 환갑을 넘긴 명예교수가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회 초년생 및 대학교 1~2학년생에게 전공 지식을 설명해주는 교양서를 쓴다면 어떨까? 지식과 경험(연륜)을 갖춘 점에서는 존경할 만한 저자지만, 그가 이른바 ‘디자인 감각’도 없는 것 같은데 이것저것 꼬투리를 잡는 모습을 보다 보면 화딱지가 난다(여담이지만, 《심플화려》에 따르면 자신에게 디자인 감각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위험하다).


일부 저자는 책을 누가 읽을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대체로 어떤 식으로든 심오한 의미를 표지 안에 마구 집어넣으려고 한다. 한번은 생물학 교양서를 만들 때였다, 표지 시안을 받아본 저자는 톤이 너무 밝은 것 같다며 수정을 요청했다. 본문에서는 질소 비료의 발명으로 농업 생산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내용이 나왔는데, 저자는 ‘녹색혁명’을 언급하면서 표지에 녹색이 들어가길 희망했다. 직접 그림까지 그려서 그가 제시한 짙은 녹색이 내 눈에는 이질적이고 촌스럽게만 느껴졌다.


표지에 어떤 의미를 담는 게 반드시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독자는 그 책의 내용을 거의 모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만약 책의 내용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표지에 아무리 의미를 담아봤자 대부분의 독자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심오한 의미를 온전히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한 명, 바로 저자 본인이다.


독자를 생각하지 않는 저자의 무리한 디자인 수정 요구는 결국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다. 이럴 거면 자비출판을 하든가! 혼자 책 만들고 혼자 읽고 혼자 기뻐하라고ㅠㅠ. 새로운 시안을 계속 만들어내고 납득하기 어려운 세세한 요구들을 일일이 들어주면서 디자이너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편집자가 저자에게 휘둘려서 디자이너 쪽으로 부담을 전가하는 것 역시 갑질이다. 중요한 건 여기서 갑질을 하는 사람은 저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건 엄연히 디자이너에 대한 출판사의 갑질이다. 책임을 저자에게 떠넘기지 말자. 어쨌든 가장 중요한 부분인 내용(글)을 담당하는 저자(저작권자)에게는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자기 의견을 제시할 권리가 있다. 중간에서 편집자는 그 의견을 적당히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자가 됐든 혹은 사장이 됐든 어떤 디자인 시안을 보고 ‘그냥 좀 별로다’라고 말하는 경우는 흔하다. 50대 남성이자 여성 직원에게 “왜 이렇게 신 커피를 마셔? 임신했어?”라고 ‘농담’을 던지는 사람이 20대 여성 페미니스트를 위한 책에 간섭하는 경우도… 있다(아, 내가 이런 일을 겪었다는 건 아니다. 아무튼 아님!).


하지만 그들 마음에 안 드는 디자인이 독자에게도 마찬가지일까? “디자인이 별론데 좀 수정해주세요”하고 말하려면 그 ‘별로’라는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고 설득해야 한다. 독자를 면밀하게 분석하고, 콘셉트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참고할 만한 레퍼런스를 모아 작성한 기획서(원고 검토서)가 곧 근거가 된다. 이걸 바탕으로 디자이너를 설득하거나, 아니면 무리하게 요구하는 저자나 사장을 설득하거나.


하지만 꽤 많은 책이 설득의 과정 없이 ‘그냥’ 만들어진다. “오옼ㅋ 이거 재밌는데? 책으로 만들자!”라는 단순한 생각만으로 책이 기획되다 보니, 최초에 그렇게 판단한 사람(저자 혹은 사장님)이 보기에 ‘재미없는’ 디자인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여기서 자신의 디자인 의도와 지금의 트렌드를 설명하며 열성적으로 반박하는 디자이너도 있지만, 그냥 체념하는 사람이 더 많다.


체념은 “희망을 버리고 단념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좌절감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심각한 갑질이 아닐 수 없다. 남는 건 돈밖에 없어! 문제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출판계에는 계약서를 쓰지 않는 관행이 있다는 점이다. 돈을 제대로 받지 못할 수도 있다.


못난 편집자(나)를 둔 디자이너에게 증말 미안하다! 《심플화려》는 출판편집자인 나에게 비수를 꽂으면서 훌륭한 인사이트를 제공했다. 나도 모르게 갑질을 하고 있었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갑질을 안 할 수 있을까? 조금 변명을 하자면 이는 비단 나 혼자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오디오북은 다른 일을 하면서 듣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운전 중이라든가 청소 중이라든가. 나는 게임을 하면서 이 책을 힐끔힐끔 들었는데, 그러다 보니 내용에 온전히 집중하진 못했다. 그럼에도 나에게 의미 있는 독서(아니, 청서[聽書]?)였다. 다시 말해 이는 좀 대충 읽어도 괜찮을 만큼 책에 좋은 내용이 잘 담겨 있다는 뜻이다. 나뿐만 아니라 출판계의 다른 많은 사람이 이 책을 듣거나 읽고 같이 고민해줬으면 좋겠다.


(여담: 낭독하신 남도형 성우님 목소리가 넘무 좋았다. 귓속에서 로열젤리가 만들어지는 줄 알았다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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