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비판의 역설
"왜 나는 맨날 이 모양이지."
또 미뤘다. 해야 할 일을 끝까지 미루다가 결국 마감 직전에 허겁지겁 끝냈다. 아니면 아예 못 끝냈다. 그리고 자책이 시작된다.
"왜 진작 안 했을까. 나는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하지. 이러니까 맨날 이 모양이지."
많은 사람들이 자책을 동기부여 수단으로 생각한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면 다음에는 더 잘할 거라고. 자신에게 엄격해야 게을러지지 않는다고. 그래서 미룬 뒤에 자책하고, 자책하면서 "다음에는 안 그래야지" 다짐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렇게 자책해도 다음에 또 미룬다. 그리고 또 자책한다. 이 사이클이 끝없이 반복된다.
자책의 문제는 불쾌한 감정을 해결하지 않고 오히려 더한다는 것이다.
일을 미루는 이유가 뭐였는지 떠올려보자. 과제를 할 때 느끼는 불안, 지루함, 막막함. 이런 불쾌한 감정을 피하고 싶어서 미뤘다. 그런데 미룬 뒤에 자책하면 어떻게 될까? 죄책감, 수치심, 자기혐오가 추가된다. 불쾌한 감정이 더 늘어난 것이다.
그럼 다음에 같은 과제를 마주하면? 원래의 불안에다가 "지난번에 미뤄서 자책했던 기억"까지 얹힌다. 그 과제는 이제 더 불쾌한 것이 된다. 더 피하고 싶어진다. 더 미루게 된다.
자책 → 불쾌한 감정 증가 → 더 피하고 싶음 → 더 미룸 → 더 자책.
악순환이다.
캐나다 비숍 대학교의 퓨셔 시로이스(Fuschia Sirois) 교수는 2014년 연구에서 자기비판과 미루기의 관계를 조사했다. 결과는 명확했다. 자기비판 성향이 높은 사람들이 더 많이 미뤘다.
왜 그럴까? 시로이스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자기비판은 스트레스를 증가시킨다. 스트레스가 높아지면 불쾌한 감정을 다루는 능력이 떨어진다. 불쾌한 감정을 다루지 못하면 회피하게 된다. 회피는 곧 미루기다.
"엄격해야 나태해지지 않는다"는 믿음은 우리 문화에 깊이 박혀 있다. 직관적으로도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연구 결과는 그 반대를 말한다. 자책은 동기를 높이지 않는다. 오히려 낮춘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게 있다. "자책하지 말라"는 말이 "반성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반성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개선점을 찾는 것이다. "이번에 미룬 이유가 뭘까? 다음에는 어떻게 하면 다르게 할 수 있을까?" 이건 건강한 과정이다.
반면, 자책은 다르다. 자책은 행동이 아니라 자기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다. "나는 왜 이 모양이지. 나는 의지박약이야. 나는 안 돼." 행동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냥 기분만 나빠진다.
반성은 "무엇을 다르게 할까"를 묻는다. 반면, 자책은 "나는 왜 이런 인간일까"를 묻는다. 전자는 앞으로를 본다. 후자는 나를 깎아내린다.
3화에서 완벽주의를 다뤘다. 특히 "남들이 나에게 완벽을 기대한다"고 느끼는 사회부과 완벽주의가 미루기와 강하게 연결된다고 했다.
완벽주의자들은 자책도 심한 경향이 있다. 높은 기준에 못 미치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다. "이 정도밖에 못 하다니. 나는 부족해." 기준이 높을수록, 그 기준에 못 미칠 때마다 자책할 일도 많아진다.
그리고 자책이 심할수록 미루기도 심해진다. 완벽주의 → 자책 → 미루기. 연결된 고리다.
자책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스스로를 개선할 수 있을까? 채찍질 없이 어떻게 동기를 유지할 수 있을까?
답은 의외의 곳에 있다. 스스로에게 더 친절해지는 것이다.
"미뤘으니까 자책해야지"가 아니라 "미뤘네. 힘들었나 보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해보자."
직관적으로는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자신에게 친절하면 더 나태해지지 않을까? 그런데 연구는 그 반대를 보여준다.
다음 글에서는 이 "스스로에게 친절해지기"를 심리학에서 어떻게 다루는지 살펴본다. 자기자비(self-compassion)라는 개념이다.
Ferrari, J. R. (1995). Perfectionism cognitions with nonclinical and clinical samples. Journal of Social Behavior and Personality, 10(1), 143–156.
Sirois, F. M. (2014). Procrastination and stress: Exploring the role of self-compassion. Self and Identity, 13(2), 128–145.
Sirois, F. M., & Pychyl, T. A. (2013). Procrastination and the priority of short-term mood regulation: Consequences for future self. Social and Personality Psychology Compass, 7(2), 115–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