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의 세 얼굴
"지금 시작하면 밤새야 하는데... 차라리 내일 컨디션 좋을 때 제대로 하자."
이렇게 미루다 보면 내일도, 모레도 "제대로 할 수 있는 날"은 오지 않는다. 마감 전날이 되어서야 허겁지겁 시작하고, 결국 "제대로" 하지 못한 결과물을 낸다. 그리고 또 자책한다. "왜 진작 시작 안 했을까."
이 패턴이 익숙하다면, 당신에게는 완벽주의 성향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완벽주의자들은 높은 기준을 가진 사람들이다. 문제는 그 기준이 너무 높아서 시작조차 못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보고서를 쓰려는데 "제대로 된 보고서"의 이미지가 너무 선명하다.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것과 그 이미지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다. 그 간극이 불안을 만든다. 불안을 피하고 싶다. 그래서 미룬다.
불안은 일을 미루게 만드는 핵심 연료다. 완벽주의는 그 불안을 끊임없이 공급하는 발전소 같은 것이다.
그런데 완벽주의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꼼꼼하고, 기준이 높고, 일을 잘하는 사람.
이상한 점이 있다. 어떤 완벽주의자는 실제로 뛰어난 성과를 낸다. 높은 기준 덕분에 남들보다 더 꼼꼼하게 준비하고, 더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만든다. 반면 어떤 완벽주의자는 오히려 일을 끝내지 못한다. 너무 완벽하게 하려다가 시작도 못 하고, 마감을 놓치고, 능력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같은 완벽주의인데 왜 결과가 이렇게 다를까?
여러 설명이 있지만, 심리학자들이 주목한 한 가지는 완벽주의가 "누구를 향하느냐"다.
캐나다 심리학자 폴 휴잇(Paul Hewitt)과 고든 플렛(Gordon Flett)은 1991년 연구에서 완벽주의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첫째, 자기지향 완벽주의(self-oriented perfectionism).
스스로에게 높은 기준을 세우는 것이다. "나는 완벽해야 해."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한다.
둘째, 타인지향 완벽주의(other-oriented perfectionism).
다른 사람에게 높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다. "너는 왜 이것밖에 못 해?" 타인의 실수를 참기 어렵다. 주변 사람들에게 비현실적인 기대를 한다. 팀 프로젝트에서 다른 사람 일을 대신 해버리거나, 관계에서 갈등이 잦다.
셋째, 사회부과 완벽주의(socially prescribed perfectionism).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완벽을 기대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한테 완벽하길 바라." 부모님의 기대, 상사의 눈치, 사회적 시선. 이런 외부 압력이 나를 완벽해야 한다고 몰아붙인다고 느낀다.
세 가지 중에서 일을 미루는 것과 가장 강하게 연결된 것은 무엇일까?
여러 연구들이 일관되게 지목하는 것은 사회부과 완벽주의다.
자기지향 완벽주의는 오히려 미루기와 관련이 약하거나, 때로는 부정적 상관을 보이기도 한다. 스스로에게 높은 기준을 세우는 사람들은 그 기준을 달성하기 위해 실제로 일을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성과를 내는 완벽주의자"가 이 유형에 가깝다.
그러나 사회부과 완벽주의는 다르다. "남들이 나에게 완벽을 기대한다"는 믿음은 엄청난 압박감을 만든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비난받고, 거부당하고, 사랑받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긴다. 이 두려움이 불안을 키우고, 불안이 회피를 부른다.
2화에서 다룬 자기불일치 이론을 떠올려보자. 의무적 자기, 즉 "내가 되어야 한다고 느끼는 나"와 실제 나 사이의 간극이 불안을 만든다고 했다. 사회부과 완벽주의자에게 이 의무적 자기는 외부에서 온다. 부모님이 원하는 나, 상사가 기대하는 나, 사회가 요구하는 나. 이 기준들이 높을수록, 그리고 그 기준이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라고 느낄수록, 불안은 더 커진다.
완벽주의가 미루기로 이어지는 과정을 정리하면 이렇다.
높은 기준 → 기준과 현실의 간극 인식 → 불안 → 불안 회피를 위해 미루기
그런데 미루면 어떻게 될까? 시간이 줄어든다. 시간이 줄어들면 완벽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줄어든다. 이제 "시간이 없어서 완벽하게 못 한 것"이라는 핑계가 생긴다. 실패했을 때 쓸 핑계를 미리 만들어두는 전략인 셀프 핸디캐핑과 같은 패턴이다.
결국 완벽주의는 역설적으로 완벽과는 거리가 먼 결과를 만든다. 완벽하게 하고 싶어서 미루다가, 시간에 쫓겨 대충 하거나, 아예 포기하거나.
완벽주의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높은 기준을 가지는 것은 성장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그 기준이 현실적인지, 그리고 그 기준이 정말 내 것인지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내가 세운 기준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기대를 내면화한 것인가?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까?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경험이 있는가?
다음 글에서는 완벽주의자들이 흔히 빠지는 또 다른 함정을 다룬다. 바로 자기비판이다. "완벽하지 못한 나"를 스스로 공격하는 습관이 어떻게 일을 더 미루게 만드는지 살펴볼 것이다.
Flett, G. L., Hewitt, P. L., & Martin, T. R. (1995). Dimensions of perfectionism and procrastination. In J. R. Ferrari, J. L. Johnson, & W. G. McCown (Eds.), Procrastination and task avoidance (pp. 113–136). Plenum Press.
Hewitt, P. L., & Flett, G. L. (1991). Perfectionism in the self and social contexts: Conceptualization, assessment, and association with psychopathology.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60(3), 456–470.
Sirois, F. M., Molnar, D. S., & Hirsch, J. K. (2017). A meta-analytic and conceptual update on the associations between procrastination and multidimensional perfectionism. European Journal of Personality, 31(2), 137–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