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기반 동기
마감이 3일 남았다. 노트북을 열고 문서를 켠다. 커서가 깜빡인다.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 있는데, 머릿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먼저 도착한다. "어차피 나는 마감 전날에야 시작하는 사람이니까." 노트북을 닫는다. 넷플릭스를 켠다. 그리고 3일 뒤, 예상대로 밤새 일한다.
"역시 나는 이런 사람이야."
이런 경험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순간, 내가 일을 미루고 3일 뒤 급하게 처리한 건 "의지가 약해서"일까?
"이번 과제는 미루겠지"라는 생각과 "나는 미루는 사람이야"라는 생각은 비슷해 보이지만 차원이 다르다. 전자는 특정 상황에 대한 예측이다. 후자는 나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정의다.
그래서 후자가 훨씬 강력하다. 특정 상황에 대한 예측은 상황이 바뀌면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정의는 상황과 무관하게 작동한다. 정체성 수준으로 올라간 믿음은 왜 그렇게 쉽게 안 바뀔까?
남캘리포니아 대학교(USC)의 사회심리학자 다프나 오이저만(Daphna Oyserman)은 정체성 기반 동기(Identity-Based Motivation, IBM) 이론을 통해 이 질문에 답한다.
그녀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행동을 선호하고, 부합하지 않는 행동은 자연스럽게 피한다. "나다운" 행동은 쉽게 느껴지고, "나답지 않은" 행동은 어렵게 느껴진다.
예를 들어, "나는 이메일을 바로 처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받은 편지함에 알림이 뜨면 곧바로 열어본다. 귀찮음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게 나니까"라는 감각이 행동을 밀어준다. 반면 "나는 원래 답장이 느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같은 귀찮음이 포기의 이유가 된다. "역시 나답지 않아."
정체성은 행동의 필터 역할을 한다. 같은 상황, 같은 어려움이라도 "이게 나다운 일인가"에 따라 해석이 완전히 달라진다.
IBM 이론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어떤 행동이 정체성에 부합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어려움을 해석하는 방식 자체가 바뀐다는 것이다.
행동이 정체성과 일치할 때, 어려움은 "중요하다"는 신호가 된다. "이게 쉽지 않네.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라는 뜻이겠지." 어려움이 포기의 이유가 아니라 지속의 이유가 된다.
반면 행동이 정체성과 일치하지 않을 때, 같은 어려움이 정반대의 신호로 바뀐다. "이렇게까지 힘든 걸 보면, 나한테 맞지 않는 거야." 어려움이 포기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이걸 미루기에 대입하면 이렇다. "나는 미루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에게, 할 일을 바로 시작하는 건 정체성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그래서 시작하려고 할 때 묘한 저항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저항감은 "역시 나는 이런 일에 안 맞아"라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미루고 나면? "역시 나는 미루는 사람이야." 정체성이 확인된다. 반대로, 미루지 않고 바로 시작한 날이 있더라도, 그 경험은 "예외"로 처리된다. "오늘은 운이 좋았네." "이건 쉬운 일이라 가능했을 뿐이야."
자기 믿음에 부합하는 정보만 기억하고 반대되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 즉 확증 편향이 여기서도 작동하는 것이다. 결국 "나는 미루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에는 이중 잠금장치가 걸린다. 믿음이 행동을 만들고(자기충족적 예언), 정체성이 그 행동을 "나다운 것"으로 해석하게 만든다(정체성 기반 동기).
여기까지 읽으면 답답할 수 있다. 정체성이 고정된 채 나를 막아서고 있다면, 대체 어디서부터 바꿔야 할까?
다행히 오이저만의 연구가 보여주는 핵심 메시지가 있다.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이다.
IBM 이론의 중요한 전제는 이것이다. 정체성은 타고나거나 영구적으로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맥락에 놓이느냐에 따라 다른 정체성이 전면에 나온다. 직장에서는 "일 잘하는 사람"이 활성화되고, 집에서는 "편하게 쉬는 사람"이 활성화된다. 정체성은 고정된 진실이 아니라, 상황이 꺼내놓는 자기 이미지다.
이건 희소식이다. 상황을 바꾸면, 활성화되는 정체성도 바꿀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오이저만의 다음 연구가 이를 보여준다. 그녀와 동료 데니스 바이비(Denise Bybee), 켄드라 테리(Kendra Terry)는 디트로이트 지역의 저소득층 중학생 264명을 대상으로 개입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학업을 계속하는 미래의 나"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한 것이다. 이 개입을 받은 학생들은 학업에 대한 정체성이 강화되었고, 실제로 학교 과제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으며, 결석률도 줄었다.
핵심은 학생들의 능력이 바뀐 게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정체성이 전면에 나왔느냐가 바뀌었을 뿐인데, 행동이 따라서 바뀌었다.
정체성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면, "나는 미루는 사람"이라는 문장은 '사실'이 아니다. 반복해서 활성화된 자기 이미지일 뿐이다. 그리고 반복된 패턴은 바꿀 수 있다.
여기서 작지만 중요한 전환이 있다. "나는 미루는 사람"이라는 문장을 "나는 미루는 패턴을 가진 사람"으로 바꿔보는 것이다.
이 두 문장의 차이는 미묘하지만 심리적 무게가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정체성이다. "나 = 미루는 사람." 바꾸려면 나 자체를 바꿔야 할 것 같다. 후자는 행동 패턴이다. "나는 그대로인데, 미루는 습관이 붙어 있는 것." 패턴은 떼어낼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감 3일 전, 다시 노트북을 연다. 커서가 깜빡인다. 이번에는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미루는 사람이니까" 대신, "또 그 패턴이 작동하고 있네." 이 한 문장의 차이가 노트북을 닫느냐 마느냐를 가를 수 있다.
변화의 출발점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져보는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이 인지적 전환을 더 구체적으로 다룬다. 생각의 틀 자체를 바꾸는 기법, 인지적 재구성이다.
Oyserman, D. (2007). Social identity and self-regulation. In A. W. Kruglanski & E. T. Higgins (Eds.), Social psychology: Handbook of basic principles (2nd ed., pp. 432–453). New York: Guilford Press.
Oyserman, D., Bybee, D., & Terry, K. (2006). Possible selves and academic outcomes: How and when possible selves impel action.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91(1), 188–204.
Oyserman, D., & Destin, M. (2010). Identity-based motivation: Implications for intervention. The Counseling Psychologist, 38(7), 1001–1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