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을 바꾸면 AI의 답변이 달라진다

by 사심가득

같은 상황인데 AI에게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커플 검사 서비스를 만들 때 일이었어요. 리포트를 어떻게 구성할지 고민하다가, AI에게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커플 심리검사 결과 리포트 만들어줘."


돌아온 결과물은 깔끔했습니다. 성격 유형 비교, 갈등 위험 요인 분석, 관계 위험도 점수. 구조도 논리적이고, 문장도 매끄러웠어요. 그런데 뭔가 아쉬웠습니다. 이걸 받아본 커플이 기분이 좋을 것 같지 않았거든요. "당신들의 관계에는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라는 느낌이 강했어요. 진단서처럼요.


그래서 요청을 바꿔봤습니다.


"커플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대화할 수 있게 도와주는 리포트를 만들어줘. 문제를 지적하는 게 아니라, 차이를 발견하는 느낌으로."


결과물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같은 데이터를 쓰는데, "갈등 요인"이었던 것이 "서로 다른 점"이 되었고, "위험 신호"였던 것이 "대화가 필요한 지점"이 되었어요. 리포트의 톤 자체가 바뀌었습니다. 받아본 사람이 느끼는 감정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죠.


AI는 똑같은 AI였습니다. 바뀐 건 제가 문제를 정의한 방식이었어요.




같은 포도주스, 다른 광고, 다른 반응

이건 제 AI와의 경험에서만 발견된 현상이 아닙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미 실험으로 증명된 것이에요.


2004년, 노스웨스턴대학교의 안젤라 리(Angela Y. Lee)와 스탠퍼드대학교의 제니퍼 아커(Jennifer L. Aaker)는 흥미로운 실험을 합니다. 웰치 포도주스 광고를 두 가지 버전으로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줬어요.


한쪽 그룹에게는 이런 광고를 보여줬습니다. "비타민C와 철분이 풍부한 식단이 에너지를 높여줍니다." 이 주스를 마시면 얻을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춘 광고였어요. 더 건강해지고, 더 활력이 생기고, 더 좋은 상태가 된다는 메시지였습니다.


다른 쪽 그룹에게는 같은 포도주스를 다르게 소개했습니다. "항산화 물질이 풍부한 식단이 암과 심장병 위험을 줄여줍니다." 이번에는 피할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춘 광고였어요. 질병을 막고, 위험을 줄이고, 나쁜 결과를 방지한다는 메시지였습니다.


포도주스는 똑같습니다. 영양 성분도 같아요. 달라진 건 광고가 바라보는 관점뿐이었습니다.


리와 아커는 6번의 실험을 통해 일관된 결과를 발견합니다. 성장이나 성취를 추구하는 성향의 사람들은 "에너지를 높여줍니다" 쪽 광고에 더 설득되었어요. 반면 안전이나 보호를 중시하는 성향의 사람들은 "질병 위험을 줄여줍니다" 쪽 광고에 더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같은 제품인데 관점만 바꿨을 뿐인데, 설득력이 달라진 겁니다.


더 흥미로운 건 그 이유였어요. 자기 성향과 맞는 관점의 광고를 본 사람들은 메시지를 더 쉽게 처리했습니다. 읽는 순간 "뭔가 맞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리와 아커는 이걸 '처리 유창성(processing fluency)'이라고 불렀는데, 쉽게 말하면 정보가 머릿속에서 매끄럽게 흘러가는 감각입니다. 그리고 이 매끄러운 느낌이 제품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졌어요.


심리학에서는 이 원리를 '조절 적합(regulatory fit)'이라고 합니다. 메시지의 관점이 받는 사람의 동기와 맞아떨어질 때, 같은 내용이라도 훨씬 더 잘 먹힌다는 것이에요.




관점을 바꾸는 프레이밍 효과

심리학에는 '프레이밍 효과(Framing Effect)'라는 유명한 개념이 있어요. 1981년에 카너먼과 트버스키가 발견한 건데, 600명 중에 "200명이 산다"와 "400명이 죽는다"처럼 같은 정보를 긍정적으로 표현하느냐 부정적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선택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리와 아커의 발견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단순히 표현을 바꾼 게 아니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달랐거든요. "에너지를 높인다"와 "질병을 줄인다"는 같은 정보를 다르게 포장한 게 아닙니다. 애초에 주스를 바라보는 방향이 다른 거예요. 하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에서 출발하고, 다른 하나는 "무엇을 피할 수 있는가"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커플 리포트에서 일어난 일도 정확히 이것이었습니다. "문제를 진단하는 리포트"와 "이해를 돕는 리포트"는 같은 데이터를 다르게 표현한 게 아니에요. 데이터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달랐던 겁니다.




프레이밍은 AI와의 대화에서도 작동한다

이 원리가 흥미로운 이유는, 사람 사이의 소통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AI에게 일을 시킬 때도 똑같이 작동해요.


다시 커플 리포트 이야기로 돌아가 볼게요.


"커플의 문제점을 진단하는 리포트"는 prevention 프레임입니다. 무엇이 잘못될 수 있는지, 어떤 위험이 있는지,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죠. 이 프레임을 받은 AI는 갈등 요인을 찾고, 위험 신호를 분류하고, 점수를 매깁니다.


"커플이 서로를 이해하도록 돕는 리포트"는 promotion 프레임입니다. 무엇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지, 어떤 대화가 가능해지는지, 관계가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춰요. 이 프레임을 받은 AI는 차이를 설명하고, 서로의 관점을 연결하고, 대화 가이드를 만듭니다.


AI가 다른 게 아닙니다. 제가 건넨 관점이 다른 거예요.


그리고 이건 커플 검사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작업이든 마찬가지예요.


"이 데이터를 분석해줘"와 "이 데이터에서 우리 팀이 놓치고 있는 기회를 찾아줘"는 같은 데이터를 다루지만 다른 관점이에요. 앞의 요청은 AI에게 관점 선택을 맡기는 것이고, 뒤의 요청은 제가 관점을 정해주는 것입니다. "회의록 정리해줘"와 "이 회의에서 결정된 것과 아직 열린 질문을 구분해줘"도 마찬가지고요.


포도주스 광고의 교훈은 명확합니다. 같은 것이라도 어떤 관점에서 제시하느냐에 따라 받는 사람의 반응이 달라집니다. AI에게 건네는 요청도 다르지 않아요.




관점을 맡기면 생기는 일

AI에게 관점을 정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AI가 알아서 정합니다. 그리고 AI가 선택하는 관점은 대체로 '가장 일반적인 방향'이에요.


"커플 검사 리포트 만들어줘"라고만 하면, AI는 '커플 검사'하면 떠오르는 가장 평균적인 이미지로 접근합니다. 아마 진단, 점수, 갈등 분석 쪽에 가까울 거예요. 틀린 건 아닌데, 제가 원하던 방향은 아니었습니다.


이건 AI의 한계가 아니라 AI의 특성입니다. AI는 기존에 가장 많이 사용된 패턴을 기반으로 응답하기 때문에, 관점을 특별히 지정해주지 않으면 가장 흔한 관점을 기본값으로 채택해요. 합리적인 선택이긴 하지만, 그 기본값이 제 의도와 맞을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리와 아커의 실험이 보여준 것도 결국 같은 이야기예요. 포도주스 회사가 "에너지를 높여줍니다"와 "질병을 줄여줍니다" 중 어떤 관점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같은 제품이 전혀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와닿았습니다. 관점을 정하지 않으면, 기본값이 선택됩니다. 그리고 그 기본값이 항상 최선은 아닙니다.


그래서 "AI한테 시켰는데 결과물이 뭔가 아쉽다"는 경험이 반복된다면, AI의 능력을 의심하기 전에 한 가지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어요. 내가 관점을 정해줬는지, 아니면 AI가 알아서 고르게 내버려뒀는지.




좋은 관점은 어떻게 찾을까

그렇다면 어떤 관점이 좋은 관점일까요? 정답은 없지만, 한 가지 기준은 있습니다.


좋은 관점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에서 출발합니다.


커플 리포트의 경우, "누가 이 리포트를 읽는가?"를 먼저 생각했어요. 결혼을 앞두고 설레면서도 불안한 커플이 읽는 거예요. 그 사람들에게 "당신들에게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라는 진단서가 필요할까요? 아니면 "서로 이런 점이 다르니까, 이런 대화를 해보세요"라는 가이드가 필요할까요?


리와 아커가 발견한 처리 유창성의 원리가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받는 사람의 상태와 맞는 관점이 더 잘 먹힌다는 것. 결혼을 앞둔 커플에게는 "문제 진단"보다 "상호 이해"가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관점이었어요. 사용자를 떠올리니까 관점이 자연스럽게 정해졌습니다.


지난 글에서 문제 정의는 인간의 몫이라고 했는데,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 정의의 방향을 잡아주는 것은 '이것을 받는 사람'에 대한 이해입니다. AI는 사용자를 모릅니다. 제가 알려줘야 해요.




정리하면

같은 상황이라도 어떤 관점에서 정의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물이 나옵니다. 같은 포도주스가 "에너지 음료"도 되고 "질병 예방 음료"도 되는 것처럼, 같은 커플 데이터가 "진단서"도 되고 "대화 가이드"도 됩니다. 이것은 심리학 실험에서도, AI와의 협업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하는 원리예요.

AI에게 일을 잘 시키는 방법은 결국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를 정하는 것(지난 글), 그리고 그것을 어떤 관점에서 만들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번 글).

다음 글에서는 이 관점을 더 선명하게 만드는 방법을 이야기해 볼게요. 역설적이게도, 자유보다 제약이 있을 때 더 좋은 정의가 나옵니다.




참고문헌

Lee, A. Y., & Aaker, J. L. (2004). Bringing the frame into focus: The influence of regulatory fit on processing fluency and persuasion.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86(2), 205–218.

Tversky, A., & Kahneman, D. (1981). The framing of decisions and the psychology of choice. Science, 211(4481), 453–458.


이전 05화AI는 훌륭한 해결사지만, 문제를 찾아주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