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이 있을 때 창의적인 결과가 나온다

by 사심가득

"이런이런 프로덕트의 초안을 만들어줘"

AI에게 이 말을 해본 적 있으신가요? 처음에 저는 꽤 자주 했습니다. 이게 좋은 요청이라고 생각했어요. 제약을 걸면 AI가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움직이니까, 자유를 줘야 더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어요.


결과는 그저 그랬습니다. 대체로 흡족하지 않았죠.


예컨대 커플 검사 리포트를 만들 때, "자유롭게 구성해줘"라고 했더니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무난하지만 특색 없는 결과물이 돌아왔어요. 반면에 "결혼을 앞둔 커플이 읽는 거야, 5분 안에 읽을 수 있어야 하고, 문제 진단이 아니라 상호 이해가 목적이야"라고 조건을 붙였더니 훨씬 날카롭고 집중된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조건이 많아질수록 AI의 자유가 줄어드는 건데, 왜 결과물은 더 좋아진 걸까요?




닥터 수스와 50단어의 마법

이 역설을 설명해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1960년, 미국의 아동 문학 작가 시어도어 가이젤(닥터 수스)에게 출판사 편집자 베넷 서프가 도전장을 내밉니다. "50개 단어만 써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을 만들 수 있겠어?" 이전에 닥터 수스가 쓴 『모자 쓴 고양이(The Cat in the Hat)』는 255개 단어로 쓰인 책이었으니, 50개는 그보다 훨씬 극단적인 제약이었어요.


결과는요? 그 제약 속에서 탄생한 책이 바로 『초록 달걀과 햄(Green Eggs and Ham)』입니다. 닥터 수스의 전체 작품 중 가장 많이 팔린 책이에요. "Sam I am"이라는 반복 구문, 리듬감 있는 문장들, 단순하면서도 중독성 있는 이야기 구조. 이 모든 것이 '50단어'라는 극단적 제약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면 이 책이 탄생했을까요? 아마 아니었을 겁니다. 제약이 없었다면 닥터 수스는 평소처럼 편안한 범위 안에서 글을 썼을 거예요. 50단어라는 벽이 그를 익숙한 영역 밖으로 밀어냈고, 그 결과 전에 없던 작품이 나왔습니다.




제약이 창의성을 만든다

이건 일화에 그치지 않습니다. 심리학에서도 실험으로 확인된 현상이에요.


라이더대학교의 인지심리학자 캐트리넬 하우트-트롬프(Catrinel Haught-Tromp)는 이 현상을 직접 검증했습니다. 2017년에 발표한 논문의 이름부터 재미있어요. '초록 달걀과 햄 가설(The Green Eggs and Ham Hypothesis)'. 닥터 수스의 경험이 보편적인 원리일 수 있다는 가설이었습니다.


실험은 이랬습니다. 64명의 대학생에게 축하 카드에 들어갈 2행짜리 라임(운율이 맞는 짧은 시)을 쓰게 했어요. "생일 축하해", "고마워", "사랑해" 같은 메시지를 짧고 창의적으로 표현하는 과제였습니다.


절반의 과제에서는 특정 단어(셔츠, 조끼, 개, 개구리, 인형, 연, 드럼, 하프 중 하나)를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는 제약을 걸었어요. 나머지 절반에서는 아무 제약 없이 자유롭게 쓰게 했습니다.


결과가 흥미롭습니다. 제약이 있을 때 참가자들이 쓴 라임이 더 창의적이었어요. 이건 참가자 본인의 평가가 아니라 독립된 평가자들이 1점에서 10점 사이로 채점한 결과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연구자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사람은 창의적인 과제를 받으면 가장 먼저 익숙한 방향으로 갑니다. 머릿속에서 가장 쉽게 떠오르는, 가장 뻔한 방향이에요. 심리학에서는 이걸 '가로등 효과(Streetlight Effect)'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어두운 밤에 열쇠를 잃어버린 사람이 가로등 아래에서만 찾는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빛이 있는 곳이 편하니까요.


제약은 이 편한 길을 막아버립니다. "셔츠"라는 단어를 반드시 넣어야 하는데, "생일 축하합니다"에 셔츠가 자연스럽게 들어갈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평소라면 절대 가지 않았을 방향으로 생각이 뻗어나갑니다. 익숙한 길이 막히니까 새로운 길을 찾게 되고, 그 새로운 길에서 예상치 못한 연결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강물이 좁은 협곡을 만나면 더 빠르고 강하게 흐르는 것처럼, 생각도 제약을 만나면 더 깊고 집중적으로 흐릅니다.




AI에게 제약을 거는 법

이 원리는 AI와 일할 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자유롭게 만들어줘"라고 하면, AI도 사람과 비슷하게 가장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방향으로 갑니다. 왜냐하면 제약이 없으면 AI 역시 가장 흔한 패턴을 기본값으로 채택하거든요. 가로등 아래에서 열쇠를 찾는 셈이에요.

반면에 구체적인 제약을 주면, AI가 탐색하는 범위가 달라집니다. 제가 커플 검사에 걸었던 제약 세 가지를 예로 들어볼게요.


누구를 위한 것인가(Who): 결혼을 앞둔 20대 후반~30대 초반 커플.

무엇을 해결하는가(What):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 문제 진단이 아님.

어떤 방식으로(How): 5분 안에 읽을 수 있는 분량, 따뜻하되 가벼워 보이지 않는 톤.


이 세 가지 제약이 명확해지니까, AI의 결과물이 확 달라졌습니다. "결혼 앞둔 커플"이라는 조건이 있으니 연애 초반 커플에게나 맞을 법한 가벼운 톤이 사라졌고, "문제 진단이 아님"이라는 조건이 있으니 위험 신호 분석 같은 구조가 빠졌어요. "5분 안에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은 불필요한 설명을 잘라내는 기준이 되었고요.


제약이 하나씩 추가될 때마다, 결과물의 방향이 선명해졌습니다. 자유를 줄인 게 아니라, 불필요한 가능성을 걷어낸 거예요.




"좋은 제약"의 조건

그렇다고 아무 제약이나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1000자 이내로 써줘"는 분량 제약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방향이 생기지 않아요. "전문 용어 쓰지 마"는 표현 제약인데, 이것도 단독으로는 약합니다.


제가 경험적으로 효과가 있다고 느꼈던 세 가지 제약을 소개할게요.


첫째, 대상에 제한을 두는 것입니다. 이걸 누가 읽는가, 누가 쓰는가. "심리학을 모르는 일반인이 읽는다"와 "심리학 전공자가 읽는다"는 같은 주제를 완전히 다르게 풀게 만들어요.


둘째, 목적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이걸 읽고 나서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 "커플이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목적과 "커플의 갈등 원인을 파악한다"는 목적은 같은 데이터를 전혀 다르게 조직하게 합니다.


셋째, 형식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분량, 톤, 구조, 포맷. "5분 안에 읽을 수 있어야 하고, 진지하되 무겁지 않게"는 AI가 문장 하나를 고를 때마다 참고할 수 있는 기준이 됩니다.


이 세 가지가 겹칠수록 결과물은 뾰족해지고, 하나라도 빠지면 결과물이 흐릿해집니다.




정리하면

지난 두 글에서 이야기한 것을 하나로 모아볼게요.


무엇을 만들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 문제 정의였고(5화), 어떤 관점에서 만들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 프레이밍이었습니다(6화). 이번 글에서는 그 정의와 프레이밍을 더 선명하게 만드는 방법을 이야기했어요. 대상, 목적, 형식이라는 제약을 구체적으로 설정하는 것이요.


AI 시대에 인간의 역할은 해결이 아니라 정의에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어요. 그리고 '좋은' 정의란,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라 적절한 제약이 갖춰진 상태에서 나옵니다.


결국 AI에게 좋은 결과물을 얻는 비결은, AI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는 게 아니라 더 좋은 제약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챕터 2를 마칩니다.


챕터 1에서는 AI와 함께 생각하는 기본기를 다뤘습니다. 목적을 전달하고, 생각을 정리하고, 막힐 때 질문을 활용하는 법이었죠.


챕터 2에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가서, 문제를 정의하고 프레이밍하고 제약을 설정하는 법을 다뤘습니다. AI가 잘하는 '해결'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이 해야 하는 '정의'의 영역이었어요.


다음 챕터에서는 조금 다른 질문을 던져보려 합니다. 문제를 정의하려면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알아야 하는데, 그 '누구'를 이해하려면 동기와 욕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AI에게는 (적어도 아직은) 없는 것, 하지만 인간에게는 모든 행동의 출발점이 되는 것. 그 이야기를 다음에 해볼게요.




참고문헌

Haught-Tromp, C. (2017). The Green Eggs and Ham hypothesis: How constraints facilitate creativity. Psychology of Aesthetics, Creativity, and the Arts, 11(1),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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