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결정성 이론
"우리는 왜 이걸 만들려고 하는가?"
커플 심리검사 서비스를 만들면서 제가 우리 팀에게 가장 많이 던진 질문입니다. 그런데 AI에게는 한 번도 이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AI에게 "커플 검사 리포트 만들어줘"라고 하면, AI는 곧바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리포트 구조를 짜고, 항목을 나누고, 문장을 다듬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요.
그런데 AI는 한 번도 이렇게 묻지 않았습니다. "이 커플은 왜 검사를 받으려는 건가요? 결혼 전에 불안해서인가요? 갈등을 해결하고 싶어서인가요? 아니면 그냥 재미로 해보는 건가요?"
이 질문이 왜 중요할까요? 불안 때문에 검사를 받는 커플에게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심의 메시지가 필요합니다. 갈등 해결이 목적인 커플에게는 구체적인 대화 가이드가 필요하고요. 재미로 해보는 커플에게는 가볍고 흥미로운 결과가 필요합니다. 같은 검사인데, "왜"에 따라 리포트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는 겁니다.
AI는 이 차이를 모릅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왜"라는 질문의 답은 데이터 안에 없으니까요. 사람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사이먼 사이넥(Simon Sinek)이 유명한 TED 강연에서 '골든 서클(Golden Circle)'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과 기업은 "무엇을(What)" 하는지는 알고, "어떻게(How)" 하는지도 알지만, "왜(Why)" 하는지는 모른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을"이 아니라 "왜"라고요.
이 프레임은 AI와 일할 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AI에게 "무엇을" 만들라고 하면, AI는 "어떻게"에서 탁월한 성과를 보여줍니다. 코드를 짜고, 문장을 다듬고, 디자인을 구성하는 건 AI가 이미 인간보다 빠릅니다. 하지만 "왜 이걸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AI가 스스로 찾을 수 없습니다.
커플 검사 서비스를 처음 만들 때, "왜"를 제대로 정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AI에게 작업을 시킨 적이 있습니다. "커플 심리검사 리포트 만들어줘"라고만 했더니, AI가 내놓은 결과물은 이랬습니다. 성격 유형 비교표, 갈등 위험도 점수, 관계 진단 요약. 기능적으로는 완벽했습니다. 그런데 이걸 받아본 커플이 "와, 우리 관계를 이해하게 됐어"라고 느낄 것 같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 관계에 문제가 있다고?"라는 반응이 나올 가능성이 높았어요.
"왜"가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서비스의 목적이 "관계의 문제를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이라는 사실을 AI에게 전달하지 않았던 거예요.
그렇다면 사람이 무언가를 원하는 이유, 즉 "왜"는 어떤 구조를 갖고 있을까요?
심리학에서 이 질문에 가장 체계적으로 답한 이론이 있습니다. 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Edward Deci)와 리처드 라이언(Richard Ryan)이 제안한 자기결정성 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입니다.
이 이론의 핵심은 간단합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 기본적인 심리 욕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율성(autonomy), 유능감(competence), 관계성(relatedness). 이 세 가지 욕구가 충족되면 사람은 자발적으로 동기를 느끼고, 충족되지 않으면 동기가 약해집니다.
자율성은 "내가 선택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유능감은 "나는 이걸 해낼 수 있다"는 느낌이고요. 관계성은 "나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입니다.
이 이론이 유명해진 계기 중 하나는 데시가 수행한 실험입니다. 대학생들에게 소마 큐브(SOMA cube)라는 3차원 퍼즐을 풀게 했어요. 처음에는 모두 재미있게 풀었습니다. 그런데 한 그룹에게는 퍼즐을 풀 때마다 돈을 주었고, 다른 그룹에게는 아무 보상도 주지 않았습니다.
결과가 흥미롭습니다. 이후 자유 시간이 주어졌을 때, 돈을 받지 않은 그룹은 계속 퍼즐을 풀었습니다. 그런데 돈을 받았던 그룹은 퍼즐에 대한 흥미가 오히려 줄었습니다. 보상이 사라지자 "왜 이걸 하고 있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게 된 거예요.
이 발견은 이후 수백 편의 후속 연구로 확인되었습니다. 데시와 라이언이 128개의 관련 연구를 종합한 메타분석을 발표했는데, 결론은 일관되었습니다. 물질적 보상은 내재적 동기를 유의하게 약화시킵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하는 "왜"가 외부에 있으면 동기는 약해지고, 자율성·유능감·관계성이라는 내면의 욕구에 연결되면 동기는 강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론이 커플 검사 서비스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처음에 저는 유능감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정확한 분석", "전문적인 결과", "심리학적으로, 과학적으로 검증된 도구". 그래서 AI에게도 그런 방향으로 요청했고, AI는 충실하게 전문적이고 분석적인 리포트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커플들이 검사를 받는 이유를 관찰해보니, 유능감이 아니었습니다. 관계성이었어요. "우리 관계가 괜찮은 건지 확인하고 싶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느끼는지 알고 싶다",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대화하고 싶다." 전부 관계성에 대한 욕구였습니다.
이걸 깨닫고 AI에게 전달하는 방식을 바꿨습니다. "정확한 진단 리포트" 대신 "커플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대화할 수 있게 도와주는 리포트"로요. 같은 데이터를 쓰는데, 리포트의 톤이 달라졌고, 구조가 달라졌고, 받아보는 사람의 경험이 달라졌습니다.
자율성, 유능감, 그리고 관계성. 이 세 가지 중 어떤 욕구에 응답하느냐에 따라 같은 서비스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설계됩니다. 그리고 이 판단은 AI가 할 수 없습니다. 사용자의 마음을 읽고, 표면적 요청 뒤에 숨은 진짜 욕구를 파악하는 건 인간의 몫입니다.
챕터 2에서 문제를 정의하는 법, 프레이밍하는 법, 제약을 설정하는 법을 다뤘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은 결국 "이 사람은 왜 이걸 필요로 하는가?"였습니다.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AI에게 요청할 때 제약을 설정하는 것이 좋은데, 이때 Who(누구를 위한), What(뭘 해결하는), How(어떤 방식으로)를 정하면 좋습니다. 그런데 Who와 What을 제대로 정하려면, 그 사람의 욕구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욕구는 대부분 표면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궁합 좀 봐주세요"라고 말하는 커플의 진짜 욕구는 궁합 점수 그 자체를 알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커플 검사 리포트 만들어줘"라고 AI에게 요청하는 저의 진짜 목적은 리포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제가 풀고 싶은 문제는 연인 간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서로를 이해하며 관계가 깊어지도록 돕는 것입니다.
AI는 "어떻게"에서 놀라운 속도와 정확도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왜"에 대한 답은 여전히 인간에게 있습니다. AI 시대에 가장 값진 능력은 코드를 짜거나 글을 쓰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왜 원하는지를 이해하는 감각일지 모릅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왜"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 바로 맥락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같은 사람이 같은 말을 해도, 맥락이 다르면 뜻이 완전히 달라지는 이유. 여기가 AI가 특히 취약한 부분입니다.
Deci, E. L. (1971). Effects of externally mediated rewards on intrinsic motivation.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18(1), 105–115.
Deci, E. L., Koestner, R., & Ryan, R. M. (1999). A meta-analytic review of experiments examining the effects of extrinsic rewards on intrinsic motivation. Psychological Bulletin, 125(6), 627–668.
Ryan, R. M., & Deci, E. L. (2000). Self-determination theory and the facilitation of intrinsic motivation, social development, and well-being. American Psychologist, 55(1), 68–78.
Sinek, S. (2009). Start with Why: How Great Leaders Inspire Everyone to Take Action. Portfol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