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의 가장 큰 약점이 당신의 가장 큰 무기다

맥락에 대한 이해

by 사심가득

"우리 괜찮은 거지?"

이 문장을 두 커플이 질문한다고 해봅시다. 한 커플은 결혼을 3개월 앞두고 처음으로 동거를 시작한 20대 후반입니다. 생활 습관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작은 다툼이 생겼어요. 한편, 또 다른 커플은 결혼 7년 차인데, 최근 대화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이들의 질문은 표면적으로 같습니다. 그러나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첫 번째 커플이 자문하는 "우리 괜찮은 거지?"는 "이런 갈등이 있어도 결혼해도 되는 거지?"라는 불안이고, 두 번째 커플의 "우리 괜찮은 거지?"는 "우리 사이에 뭔가 잘못되고 있는 건 아니지?"라는 두려움입니다. 이 커플들에게 필요한 답이 다르고, 커플 검사 리포트의 방향도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사람이라면 이 차이를 본능적으로 압니다. 표정, 말투, 상황을 종합해서 "아, 이 사람은 지금 이런 맥락에서 이 말을 하고 있구나" 하고 파악하죠. 하지만 AI에게 "우리 괜찮은 거지?"라고 던지면, AI는 그냥 문장 그대로를 처리합니다. 맥락이 주어지지 않았다면요.




AI는 태생적으로 맥락을 모른다

AI와 인간의 큰 차이 중 하나는 바로 맥락에 대한 이해 수준입니다.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이 제안한 고맥락(high-context)과 저맥락(low-context)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활용해서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보겠습니다.


그에 따르면, 문화마다 소통 방식이 다릅니다. 어떤 문화에서는 말의 의미 대부분이 말 자체가 아니라 상황, 관계, 분위기 같은 "맥락"에 담겨 있습니다. 이걸 고맥락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어떤 문화에서는 말한 그대로가 의미입니다. 명시적이고 직접적이죠. 이걸 저맥락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합니다.


한국은 대표적인 고맥락 문화입니다. "밥 먹었어?"가 진짜 식사 여부를 묻는 게 아니라 안부 인사인 것처럼요. "괜찮아"가 진짜 괜찮다는 뜻이 아닌 것처럼요. 우리는 매일 맥락에 의존해서 소통합니다. 같은 "괜찮아"도 표정, 말투,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죠.


AI는 이 스펙트럼에서 극단적인 저맥락에 위치합니다. AI에게는 텍스트로 입력된 것이 전부입니다. 표정도, 말투도, 관계의 역사도 없습니다.


그래서 "커플 검사 리포트 만들어줘"라고 하면, AI는 그 문장에 담긴 정보만으로 작업합니다. 이 커플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어떤 감정 상태인지, 이 검사를 왜 받으려는 건지 전부 모릅니다.




AI의 약점이 인간의 무기가 된다

여기서 반전이 있습니다. AI가 맥락을 스스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건, 뒤집으면 이런 뜻입니다. 맥락을 넣어주면 AI가 완전히 다른 도구가 된다는 것이지요.


커플 검사 서비스를 만들 때 제가 직접 경험한 일입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커플 심리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리포트를 만들어줘."


AI는 깔끔한 리포트를 만들어냈습니다. 성격 유형 비교, 소통 방식 차이, 갈등 가능성 분석. 구조적으로 나무랄 데 없었어요. 하지만 뭔가 빠져 있었습니다. 이 리포트를 받아볼 커플의 상황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는 구체적인 맥락을 추가했습니다.


"결혼 3개월 전, 첫 동거를 막 시작한 20대 후반 커플이야. 생활 습관 차이 때문에 작은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어. 서로를 좋아하는 건 확실한데, 이런 차이가 결혼 후에도 계속될까 봐 불안한 상태야. 이 커플이 읽을 리포트를 만들어줘."


결과물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같은 AI입니다. 같은 검사 데이터입니다. 하지만 리포트의 톤이 바뀌었습니다. "갈등 위험 요인"이라고 적혀 있던 부분이 "동거 초기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차이"로 바뀌었고, "소통 방식 불일치"라는 딱딱한 제목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두 사람"이 되었습니다. 불안한 커플이 읽었을 때 "아, 이건 문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과정이구나"라고 느낄 수 있는 리포트가 된 거예요.


맥락 한 문단이 리포트 전체의 방향을 바꿨습니다.




맥락을 전달하는 세 가지 축

그렇다면 AI에게 어떤 맥락을 전달해야 할까요? 제가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발견한 건, 효과적인 맥락에는 세 가지 축이 있다는 겁니다.


첫째, 상황 맥락입니다. 이 사람은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가. "결혼 3개월 전, 첫 동거를 시작한 커플"이라는 정보는 상황 맥락입니다. 이 한 줄이 있고 없고에 따라 AI가 선택하는 단어, 구성하는 구조, 설정하는 톤이 달라집니다.


둘째, 감정 맥락입니다. 이 사람은 지금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가. "서로 좋아하는 건 확실한데, 차이가 결혼 후에도 계속될까 봐 불안한 상태"라는 정보는 감정 맥락입니다. 이 정보가 있으면 AI는 진단적 톤 대신 안심과 이해의 톤을 선택합니다.


셋째, 관계 맥락입니다. 이 결과물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관계는 어떤가. 커플 검사의 경우, 이 리포트를 두 사람이 함께 읽는다는 사실이 관계 맥락입니다. 혼자 읽는 보고서와 둘이 함께 읽는 리포트는 문체부터 달라야 하니까요.


이 세 가지 축이 겹칠수록 AI의 결과물은 정확해집니다. 상황만 주면 방향이 맞고, 감정까지 주면 톤이 맞고, 관계까지 주면 디테일이 맞습니다.




맥락을 읽는 사람이 AI를 가장 잘 쓴다

이전 글에서 AI 시대에 가장 값진 능력은 "왜"를 묻는 감각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를 더하면, 그 "왜"를 둘러싼 맥락을 읽고 AI에게 전달하는 능력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능력이 전혀 새로운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매일 하고 있는 일이에요. 친구가 "나 요즘 힘들어"라고 하면, 우리는 그 친구의 상황, 감정, 관계를 종합해서 "어떤 종류의 힘듦인지" 파악합니다. 직장 때문인지, 연애 때문인지, 건강 때문인지. 그리고 그에 맞는 반응을 합니다. 이게 바로 맥락을 읽는 능력입니다.


AI와 일할 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다만 한 가지 차이가 있어요. 사람과 대화할 때는 맥락이 자동으로 공유됩니다. 표정, 말투, 공유된 경험이 맥락을 채워주니까요. 하지만 AI에게는 맥락을 명시적으로 써서 전달해야 합니다. 머릿속에 있는 맥락을 글자로 꺼내는 거예요.


이건 고맥락 소통에 익숙한 우리에게 오히려 좋은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중에 상대방은 모르는 게 뭘까?"라고 자문하는 연습이니까요. AI에게 맥락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 생각을 더 선명하게 정리하게 됩니다.


결국 AI의 가장 큰 약점, 즉 맥락을 스스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은, 뒤집으면 우리에게 가장 큰 기회이기도 합니다. 맥락을 잘 읽고 잘 전달하는 사람이 AI를 가장 잘 쓰는 사람이 됩니다. 프롬프트 기법 열 가지를 외우는 것보다, 상황, 감정, 그리고 관계라는 세 가지 맥락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한 문단이 더 강력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AI에게 없는 요소인 욕구와 맥락을 알아보았습니다. 마지막 요소가 남아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 대한 진정 깊은 이해는 어디서 올까요? 바로 경험입니다. 직접 경험해본 사람만 아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참고문헌

Hall, E. T. (1976). Beyond Culture. Anchor Books/Doubleday.

Ryan, R. M., & Deci, E. L. (2000). Self-determination theory and the facilitation of intrinsic motivation, social development, and well-being. American Psychologist, 55(1), 6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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