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 복용하면서부터 술을 끊었다. 그게 벌써 햇수로 사 년이 되어간다. 사람들에게는 '맛이 없어서' 술을 먹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무알콜 맥주를 권했고, 또 다른 이들은 달콤한 술을 권했다. 위선과 가식 그리고 흥이 폭발하는 단체 회식에서 알콜의 기운없이 버티는 건 정말 기 빨리는 일이지만, 술과 끊어진 삶에 아쉬움은 없었다.
"1차만 하고 갈 거잖아. 술 안 먹는 사람 몫까지 감당하기 힘들다고."
때로 금주한다는 것이 득이 됐다. 업체와의 미팅에서 나는 전력 외 인물로 구분되어 술자리에 열외됐다. 큰맘 먹고 자리를 채워주려고 했는데, 아예 가지 않아도 된다니. 오히려 좋아!
근데 함께 술잔을 기울여 주고 싶은 사람이 생긴다면?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같이 술 마셔달라고 조른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충동적으로 항우울제를 이틀 간 끊었다. 이따금 찾아오는 부작용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하지만 삼일째 되는 날 우울감이 증대되는 기분을 느끼고 다시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컨디션이 좋은 날, 하루쯤은 약을 끊고 술친구가 되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요구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순전히 내가 그러고 싶어서 호시탐탐 단약(斷藥)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선자리에서 애프터로 술약속을 잡으려고 한 것 때문에 파워거절해놓고 지금은 이러고 있다. 연애에서 중요한 건 상대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저 원초적인 '호감'이다.
딱 한 번만. 술친구가 되어주고 싶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평생 혼자이거나 적당한 사람 만나서 적당히 살지 않을까. 선자리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들 때문에 몇 년째 들어오는 선을 마다했다. 올해는 어쩐지 만나볼까, 라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먼저 거절했다.
"애 안 낳아도 된대? 우리 딸은 애 안 낳으려고 지금까지 결혼 안하고 있는 건데."
상대는 나와 동갑이었다. 좀더 어린 여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살 기회가 충분히 있는 사람이니 보내줘야 한다는 게 엄마의 주장이었다. 예전에는 나이 많은 남자 싫다고 거절하고서는. 이제는 내 나이가 너무 많아졌나 보다. 아픈 내가 출산과 육아로 힘들지 않길 바란 건지도 모른다. 주선한 분이 예전에 파토낸 걸로 훈계한 분이라 무섭다고 한 말이 맘에 걸렸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엄마의 주장에 공감이 갔다. 앞으로 내가 만나게 될 사람들은 결코 어리지 않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들의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 시작하기 전에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다는 말을 꼭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우울증 발생요인의 40~50%가 유전적 요인 때문이란 이야기를 듣고는 그런 생각을 더욱 굳혔다.
애초에 내가 누굴 만나도 되는 사람이긴 한 걸까? 항우울제를 먹는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제약이 따른다. 일상을 살아가는 데는 큰 지장이 없지만, 이벤트를 만드는 건 조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