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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LL Jan 13. 2021

힘들 땐 기대도 괜찮아.


  오랜만에 전 직장동료에게 연락이 왔다. 간간이 몇몇의 사람들과는 연락을 주고 받으며 회사에 대한 푸념도 듣고 서로 사는 이야기도 나누고 있었기에 그 연락이 그리 특별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전전 직장동료들과도 종종 연락하고 동네가 가까운 동료와는 자주 어울리곤 했다. 서울을 떠나올 때도 우리는 서로 동네친구를 잃는 것을 많이 아쉬워했다. 지금은 동네친구는커녕 시단위 친구도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특별할 것 없던 연락이 특별해진 건 그가 나에게 조심스레 건넨 한 마디 때문이었다.


  "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몇 년 전 한 동료에게 돌잔치 초대장을 받았다. 말수가 적고 낯을 많이 가리는 그가 나에게 돌잔치 초대장을 보내온 게 처음엔 의아했다. 그와 나는 업무 외의 것에 대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내게 돌잔치 초대장을 내민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떤 마음으로 나에게 초대장을 건넸을까? 그가 나에게 이 초대장을 건넬 수 있는 용기를 내기까지의 과정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꼭 갈게요."


  누구에게 돌잔치 초대장을 보낼 것인가. 이 문제를 두고 아마도 그는 꽤 오랫동안 고민했을 것이다. 숫기 없는 그에게 초대 리스트를 채우는 일은 매우 힘들었을 게 분명하다. 그나마 업무적으로라도 교류가 잦았던 내가 그 리스트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용기를 낸다는 것의 어려움을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나는 마음 속으로 그의 손을 꼭 잡으며 그의 용기를 응원했다.


  돌잔치가 열리는 곳은 집에서 두 시간 넘게 걸리는 곳이었다. 나는 게으른 몸을 일으켜 생후 일 년이 지난 그의 아이의 앞날을 함께 축복해줬다. 그의 용기를 떠올리지 않았다면 결코 친하지도 않은 그를 위해 주말에 귀한 시간을 할애하여 그곳에 가지는 못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때의 기억으로 먼 지역에 있던 그의 부친상에도 참석을 해 그의 가족에게 일어난 가슴 아픈 일들을 함께 나누고 위로의 말을 전하고 돌아왔다. 그가 용기 내지 않았다면 그의 기쁨도, 그의 슬픔도 내내 모르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 뒤로 그는 당직 근무를 설 때마다 담당자도 아닌 나에게 불쑥 전화해 업무에 대해 묻곤 했다. 나에겐 아니었지만, 그에겐 그나마 내가 가까운 동료가 되어버린 것이다. 근무시간 이후에 담당업무도 아닌 일로 전화를 받아 설명을 해야 하는 일이 기분 좋은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내가 그의 용기를 너무 많이 응원한 탓인가 보다라고 받아들여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 부탁해 온 동료는 제법 친한 관계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런 부탁을 할 사람으로 나를 첫 번째로 떠올렸을 사이는 아니었다. 그는 얼마나 돌고 돌아 결국 나에게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 그리고 내가 거절한다면 또 얼마나 돌고 돌아야 할까. 그의 노력이 마침내 빛을 발하게 되는 순간이 오기는 할까.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사람 사는 건 다 뻔하고 다들 빠듯하게 살아가니까. 나에게 없는 여유가 너에게 있을 거라고 쉽게 보장할 수 없다. 나는 다시금 나에게 부탁을 꺼낸 사람의 용기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한참 동안 그가 내게로 오게 된 경위에 대한 이야기를 듣던 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 금액을, 얼마 동안 빌려드리면 돼요?"


  그가 돈 이야기를 꺼냈을 때 가장 염려되었던 부분은 나의 현재 능력치를 초과하는 금액이라 그를 도울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는 여기저기 물어보고 있으니 가능한 만큼만 빌려주면 급여일마다 최대한 상환하겠다고 말했다. 다행히 여기저기서 긁어모으면 그가 필요한 만큼의 금액을 조금 넘는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걱정했던 것만큼 너무 큰 금액은 아니라는 것이 나에게도, 그에게도 참 다행으로 여겨졌다. 무리해서 빌려줄 필요는 없다며 연신 미안해 하는 그에게 "안 그러면 또 다른 데 부탁하셔야 되잖아요."라고 말하고 곧바로 그의 계좌로 돈을 송금했다.


  "오늘 밤은 두 다리 뻗고 푹 주무세요."


  진심으로 그가 오늘 밤 편안한 마음으로 푹 잠들길 바랐다. 내가 빌려준 돈의 이자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에게 비빌 언덕이 있다는 것,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숨쉴 구멍이 있다는 것, 그것이 참 소중한 일이라고 줄곧 생각해 왔다.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사람이고 싶었다. 누군가의 기댈 곳이 되어주는 게 내 삶의 보람이었는데, 너무 많은 이들이 기대는 어깨가 되어서인가. 언젠가부터 나의 보람은 부담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잊고 있던 삶의 보람이 다시 되살아났다. 나는 다이어리 뒤 페이지의 '소소한 행복 리스트'에 오늘의 일을 추가로 기록했다.




  돈을 송금한 뒤에야 뒤늦게 나의 자금흐름을 살펴보았다. 처음엔 예금을 깨서 빌려줄 각오까지 했었는데 다행히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보였다. 내가 계속 회사에 다녔다면 더 마음 편하게 빌려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아쉬움이 또 밀려왔다. 요즘 부쩍 회사에서 받던 월급이 아쉬운 거 보니 좀 살 만 해졌나 보다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회사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나를 믿고 용기를 내고 다가와준 이들의 면면을 떠올렸다. 그러다 문득 왜 나는 용기를 내지 못했나란 질문이 떠올랐다. 그들의 용기가 나에게 울림을 준 건, 나에게 그런 용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오즈의 마법사>의 용기 없는 사자가 생각났다. 나 역시 겉으로만 세보일 뿐, 늪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중에도 그 누구에게도 도와달라고 용기 있는 말 한 마디 해 본 적 없는 겁쟁이였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괜찮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힘들 때면 언제든 자신들에게 기대주길 바라던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았는데, 나는 늘 잘 지내는 모습만 보이고 안 좋은 모습은 감춘 채 감당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야 들키고 말았다. 잘 지내고 있겠지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갑자기 퇴사 소식을 전하며 뒤통수를 날렸다. 내가 원하기만 했다면 어깨를 내어줄 사람들이 참 많았는데, 나는 용기를 내지 못했다.


  다음 번엔 꼭 용기를 내야겠다. 용기를 낸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알았으니까. 나도 다음에는 무너지기 전에 꼭, 내가 손 내미길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 도와달라고 말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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