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열한 살 된 아이는 시종일관 웃고 있었다. 이모와 몸을 맞대고 따뜻함과 애정을 느끼며 어울리고 싶었다. 그래서 위험요소가 되는 안경을 거푸 뺏었다. 이모는 안경이 없으면 앞이 보이지 않는다며 하지 말라고 칭얼거렸다. 아이에게는 그 모든 과정이 놀이였다. 이모는 결국 아이에게서 달아났다. 아이는 이모를 쫓았고 아까보다 거친 방식으로 안경이 손에 쥐어지는 게 느껴졌다. 순간 이모가 아이의 손목을 낚아챘다. 화들짝 놀랄 만큼 강한 힘이 느껴져 아이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너… 손목 분질러 버린다."
내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단어들이 더듬대며 자리를 찾아 발화되고 있었다. 나는 정말 아직 덜 자란 아이의 가녀린 손목을 분질러 버릴 것처럼 한 손에 쥐었다.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이성 한 가닥이 그때 올라오지 않았다면 정말 손목을 똑- 하고 부러뜨렸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분명하고, 명백한 살기였다. 아이는 금세 기죽어 미안하다고 말하는 나를 용서했다. 자신이 지난 세월 알고 지낸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라면… 나라면 나를 용서할 수 있었을까? 나라면… 너무 무섭고 소름 끼쳐서 두 번 다시 상대를 못 봤을 것 같은데.
하지만 이건 어른의 시선일 뿐이다. 아이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더 자란 후에야 깨닫게 될 것이다. 나 또한 어린 시절 추행 당한 기억이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재구성되면서 히스테릭한 증상을 보이지 않았던가. 어릴 땐 모른다. 내게 일어난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래서 두렵다. 내가 너를 해하는 모든 순간들이 너에게 상처가 될까봐, 나는 그게 두렵다.
조카와 2주만에 다시 분리되었다. 이대로 가다간 나의 우울증세가 계속 악화되는 것은 물론, 점점 강도가 심해지면서 우울증에 걸린 엄마가 그러듯 조카에 대한 정서적 학대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약을 더 처방 받아 조카를 돌봐야 하나 고심했지만, 나는 조카를 돌보기 위해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치료를 위해서도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결국 가족과 상의하여 조카와 다시 분리되어 생활하기로 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 처음 분리되었을 때와 달리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강추위가 시작되던 날이었다. 조카가 어제부터 보채던 터라 집 근처 운동기구가 있는 공원으로 향했다.
'거기 가면 난 앉아만 있어야 하는데.'
같이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기에 출발할 때부터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가서 블로그 관리나 하자라고 속으로 마음 먹었다. 내 속도 모르고 조카는 신이 났다. 운동기구를 그냥 잡으면 손이 시리다고 핫팩도 두 개나 챙겼다. 이삿짐 차 옆을 지나는데 조카가 갑자기 "위험해!"라며 백팩 손잡이를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정면으로 걷고 있던 내 몸이 잠시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하지마! 이게 더 위험해! 그렇게 장난치면 넘어질 수 있다고!"
평소와 달리 말이 곱게 나가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조카도 무언가 느꼈는지 옆에 와서 조용히 걸었다. 운동기구 앞에 도착했다. 나는 운동기구 정면의 벤치에 앉아 휴대폰에 몰두하며 블로그 관리를 시작했다. 강추위에 손이 금방 시려왔다. 조카는 핫팩 두 개를 손에 쥐고 따뜻하다며 그네를 타듯 하늘걷기 운동기구를 타고 있었다.
"놀아줘."
"이모도 할일 해야지."
"나랑 이야기하고 놀자."
놀고 있는 자신에 평소처럼 집중하지 않는 것이 못마땅했는지 그렇게 타고 싶어했던 운동기구에서 내려와 옆에 앉았다.
"물 줘."
"과자 줘."
과자를 뜯기가 힘들어보여 "이모가 해줄까?"라고 말하는 순간 과자봉지가 터져 과자가 사방에 날렸다. 아이는 나의 눈치를 봤다. 아니 눈치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에휴, 어쩌겠어. 남은 것만 먹어."라고 애써 다정한 말을 건넸다. 아이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이미 떨어진 걸 어쩌겠어." 나는 다시 한번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을 건넸다. 하지만 아이에게 돌아온 말은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고양이들이 먹으면 안 되는데 치워야 하지 않을까?"
예상치 못했던 반응에 또 이성이 나갔다. 아이 입장에선 그저 고양이를 걱정한 것뿐이었을 텐데. 내 감정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가고 있었다.
"그럼 주워."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과자를 먹고 있었다. 그리고 다 먹은 봉지를 내게 건네고 다시 운동기구를 타기 시작했다.
"고양이 사료랑 비슷한데 먹어버리지 않을까?"
"알아서 안 먹겠지. 소세지도 잘 안 먹던데."
"과자 먹으면 위험한데 치워야 하지 않을까?"
"조금 먹는다고 별일 있겠어? 길에서 이것저것 먹을 텐데. 괜찮을 거야."
"고양이들이 먹으면 어떡해. 주워야 하지 않을까?"
"그럼 네가 주워."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걸 느꼈다. 아이는 여전히 운동기구에 몸을 맡긴 채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걱정되면 주우면 되잖아. 주워. 왜? 네 손으로 줍기에는 더러우니까 이모더러 주우라는 거야?"
아이는 시선을 피한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괜찮겠지."라고 답했다.
"네가 잘못해서 과자를 쏟았는데 직접 주우라니까 걱정되던 상황이 갑자기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되는 거야?"
"괜찮겠지!"
"엄마나 이모가 네 뒤치다꺼리하는 사람이야? 넌 너 심심한 것만 보이고, 이모가 따뜻한 방에서 해도 되는 일을 추위에 떨면서 하고 있는 건 안 보이지?"
이건 훈육이 아니라 비난이다. 그걸 인지하면서도 말은 여전히 곱게 나오지 않았다. 나는 모든 과정을 여동생에게 카톡으로 생중계했다. 약을 늦게 먹어서인지 오늘 내가 예민하다는 것과 함께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모두 전송했다. 찬 바람에 손이 동상에 걸릴 것처럼 아팠다.
그 후 일주일은 내내 우울했다. 의사가 지난 면담에서 내 감정을 '분노'라고 명명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렇다. 이건 확실히 분노다. 와중에 여동생이 '분노조절장애'라는 단어를 쓴 것이 속상했다. 며칠 전에는 불멍하려고 샀던 난로가 불량이라 반품한 일로 부모님이 실은 전기세 때문에 걱정했다고 이야기한 것이 상처가 됐다. 주변의 사소한 말들과 행동이 모두 상처가 됐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됐다는 것 역시 상처였다. 내가 괴물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매일 아침 눈을 뜸과 동시에 우울감이 밀려왔다. 약을 더 먹어야 할까. 병원에 가볼까. 스트레스로 식욕촉진제를 하루에 두 번씩 먹어도 유의미한 반응이 없어 식사시간마다 부모님과 전쟁을 벌였다. 신경안정제 용량을 크게 줄였음에도 꿈과 현실을 구분 못하는 경미한 환청과 환시가 다시 생겼고, 현실 도피하듯 하루 대부분을 꿈에서 보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다. 나는 이미 가해자가 되었고, 스스로를 괴물로 낙인 찍었다. 그렇게 우중충한 날들이 며칠 더 이어졌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머리 속에 세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그 문장을 곧바로 다이어리에 옮겨적었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나는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었다.
나는 우울증 환자다.
조카의 손목을 붙잡았던 경험은 생생하게 남아 내가 아이를 죽일 수도 있는 괴물이라는 죄책감이 되어 나를 괴롭혔다. 괴물인 내가 조카를 다시 마주해야 하는 날이 올까봐 두려웠다. 나는 나를 격리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애를 낳은 적도 없다. 그런데 우울증에 걸린 엄마가 아이에게 가하는 학대를 경험했다. 애초에 그런 위험에 노출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우울증 환자였다. 우울증 환자에게 아이를 맡기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란 걸 직접 겪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저 우울증 환자일 뿐, 엄마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 뒤로 상황이 극적으로 개선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차차 좋아질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 조용히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보며 되뇌인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문장을 속으로 외운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