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 중독자 Apr 20. 2021

진 희

1975년 내 기억 속 변경


1975년, 서울 변두리 천변 가 셋방살이 하던 하꼬방집 대문은 변변한 문짝하나 달려 있지 않다.

사시사철 열려있는 그 문턱으로 고만고만한 가장, 가장 곁에 아낙네 아낙네 곁에 아이들이 굴비 엮듯 줄줄이 넘어 들어온다.

마당 한가운데 자리 잡은 수도꼭지엔 코끼리 코같은 파란색 호수가 달려 있고 고무 다라이 안에는 손잡이 달린 빨간 바가지가 들어있다.

연신 물을 퍼서 상에 올릴 푸성귀를 씻고, 스텐레스 그릇, 수저와 젓가락 몇 벌을 윤기 날 때 까지 닦거나 막 삶은 걸레를 방망이로 두드리던 엄마는 찬 물이나마 실컷 써야 속이 풀린단다.

셋방 옆에 셋방 그리고 또 셋방, 개미굴처럼 이어져 방마다 사람이 살던 집

간난이처럼 깡똥한 단발머리에 꽃무늬 블라우스, 멜빵으로 고정한 진녹색 나팔바지를 날리며

달려가던 곳 ...

그 방 문을 열면 까무잡잡한 피부에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가진 진희가 살고 있다. 햇빛을 보지 못해 투명한 낮 빛을 하고 하얗고 가는 팔로 기어다니는 언니와 함께,,

진희네 방에선 항상 똥냄새가 났다

진희 엄마에겐 항상 분냄새가 났다

진희는 내 손을 잡고 담벼락 밑으로 가서 내 귀에 비밀을 털어놓기도 했다.

“ 언니가 죽었으면 좋겠어''

진희네 언니도 내 귀에 비밀을 털어 놓았다.

“ 난 죽어서 귀신이 될 거야, 귀신이 되서 엄마를 맨 먼저 잡아 갈 거야 ”

자매의 공모가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방 안을 떠 다닌다.

자물쇠가 달린 알루미늄 궤짝 위로 울긋불긋한 이불들이 쌓여있고 하얗고 투명한 진희 언니와 까맣고 긴 머리를 가진 진희가 살던 곳

다섯 살 나마저 들어앉으면 꽉 차던 작고 어두컴컴한 내 유년의 끝방

삶은 흩어지고 시간은 흘러도 기억만은 냉동시체처럼 봉인된 체 고스란히 남아있는 방

그 방에 살던

그때 그 사람들은..

지금은 어디를 부유하고 있을까?

시간의 우물을 퍼 올리다 떠오른 1975년 기억 속 변경 ( 邊境 ) 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돌 밥과 노동에 관한 책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