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메르인 Feb 27. 2023

당신의 아버지

아버지는 몰락한 양반의 후예라고 했다.


여기서 방점은 '몰락'이 아니라 '양반'에 찍혀있었다. 자식들이 믿지 않을까 봐 그랬는지, 조선 숙종시대에 장희빈의 편을 들다가 쫓겨났다고 구체적인 정황을 덧붙였다. 그간 방치되었던 족보를 어느 땐가 정리했다고 뿌듯해했다. 혹 면천한 노비인 조상이 사 온 것인지 구분할 재주가 나에게는 없었다. 드라마에서 장희빈은 임금이 내린 사약도 뿌리친 악녀로 묘사되곤 한다. 정파는 힘의 논리일 뿐 선악과 무관했다. 불운한 조상은 줄을 잘 못 섰다. 불운한 그의 후손들은 한반도 남단의 깊숙한 산속에 자리를 잡았다. 농사일에 소질이 없어, 마을 훈장이나 하며 근근이 입에 풀칠을 했다.


마을 입구에 장승이 있고, 마을회관 옆 가게 선반에는 물건이 얼마 없었다. 입구 가판에는 투명한 비닐포장의 새우깡 몇 봉지를 놓고 팔았다. 명절 때면 열 시간 가까이 차 뒷좌석에서 뒹굴어야 도착할 만큼 멀었다. 할머니는 6.25 전쟁 한 해 전에 아버지를 낳았다. 마흔이 넘어 낳은 늦둥이었다. 아버지 손에 무좀이 생겨도 방치할 만큼 무심한 시절이었다. 전쟁 중에 우연히 만난 미군이 약을 주어 손가락을 자르는 일은 피했다. 대신 후유증으로 검지 손톱이 짧고 두꺼웠다.


아버지는 하루에 두 시간씩 걸어서 학교에 갔다. 양반의 후예라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던지, 공부를 곧잘 해서 당시 지역의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60년대 후반에 모 사립대에 입학했다.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군대에 끌려갔다. 그 와중에 몰래 모인 국회의원들이 개헌안을 변칙 통과시켰다. 고시공부를 하는 동기들은 정권의 하수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졸업 뒤 한 중견기업에 입사하여 어머니를 만났다. 둘은 70년대 후반에 결혼하여 딸과 아들을 낳았다. 아버지의 부모는 첫 딸을 서운해하였다. 호적 올리는 것을 차일피일 미뤘다. 출생일 정정에 벌금을 내기 싫어 신고일을 생일로 등록했다. 둘째는 아들이어서 어머니는 더 이상의 구박을 면했다. 


아버지는 좀 더 큰 회사로 스카우트되었다. 강남의 모 아파트를 분양받았다가 마당이 있는 집을 갖고 싶어 강북의 단독주택으로 이사 갔다. 아버지의 목표는 회사에서의 성공이었고, 성공을 이루면 부와 명예가 따라온다고 믿었다. 재테크를 하는 복부인들을 경멸했다. 회사는 대기업에  인수되었다. 아버지는 임원 자리까지 올랐다. 저녁마다 술자리가 이어졌고, 주말에도 골프다 뭐다 해서 집에 있지 않았다. 자식들과는 데면데면했다.


IMF 구제금융을 받을 무렵, 회사는 몰락 중이었고 아버지는 사내정치에서 패배하여 정리해고 대상이 되었다. 회사에 평생 헌신한 대가는 퇴직금 몇천만 원이었다. 아버지는 우울증이 발병하여 정신과에 다니기 시작했다. 대신 어머니가 생계를 위해 프랜차이즈 음식점을 시작했다.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았던 탓에 수완이 없어 곧 장사를 접었다. 아버지는 운 좋게 첫 직장에 임원 자리를 얻었다. 그즈음 창업주가 돌연사하여 전문경영인이 회사를 맡게 되었다. 아버지의 과거 동료이기도 했던 전문경영인의 견제로 자리에서 곧 물러났다. 대신 지방에 소재한 중소기업에서 사외이사 등을 맡아 거마비를 벌었다. 아버지는 소소한 소비와 수집을 좋아했다. 출장차 간 호텔에서 가져온 빗과 펜을 모았고, 다이소 같은 잡화점에서 이것저것 사 오는 것을 즐겼다. 


두 자식은 제법 괜찮은 대학을 졸업하고 제법 괜찮은 회사에 취직했다. 손녀 둘과 손자 하나를 얻었다. 한 채 가진 20년 된 강북의 아파트는 역모기지로 넘겨 노후를 보장받았다. 2021년 모 정치인의 대선 캠프를 돕기 시작했다. 캠프 사무실에 나가다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 폐렴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부인을 비롯 십여 명에게 코로나 바이러스를 전파시킨 슈퍼 전파자가 되었다. 이름 모를 인터넷 매체에 가끔 글을 기고한다. 가장 최근에는 코로나 투병을 바탕으로 책을 쓰겠다고 선언했다. 그간 여러 주제와 관련하여 책을 내겠다고 공언하고 집필을 시작하였으나 아직 출간된 것은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