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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메르인 Apr 08. 2023

이제 와서 만년필 예찬

'만년필을 쓴다.'

이 문장은 여러 겹의 울림을 준다.


'나는 필기구에 관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조금 불편해도 멋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물건을 길들여 오래 쓰고 싶습니다.'


만년필은 왠지 불편할 거 같아서 쓸 생각도 안 했다. 최근 '아티스트 웨이'라는 책을 읽었다. 매일 일어나자마자 3페이지 이상 일기 쓰기, 일명 '모닝 페이지'를 권한다. 효과는 잠이 덜 깼을 때 무의식의 발현을 통해 자기 검열을 피하는 것이다. 솔깃했지만 매일 3페이지라니, 손이 아작 나겠는데? 그래서 만년필로 많이들 쓴단다. 아니, 만년필은 손이 덜 아픈가? 소인국 운동회에 참가했다고 치자. 쇠로 만든 공을 내가 대신 굴려준다면 그게 볼펜에 쓰는 에너지일 거다. 만년필은 펜촉으로 잉크를 종이에 흡수시키는 방식이라 저항이 덜하다고. (물론 볼펜의 결점을 보완한 수성펜이라는 게 세상에는 존재한다.) 결정적으로 잉크가 종이를 미끄러져가는 '버터필감'이나, 사각사각한 필기감을 느낄 수 있다는 설명. 버터필감이라니. 이 무슨 국어교과서에 나올법한 공감각적 표현인가. 


만년필의 기원은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간다. 현대의 만년필은 1884년에 워터맨사 창립자가 모세관 원리를 이용해 만들었다고 한다. 어떤 만년필을 사야 할까? 세상엔 버터의 종류보다 많은 만년필이 있다. 이 기회를 빌어 네이버 '문방삼우' 카페에 감사를 표한다. 검색 끝에 내가 주안점을 둔 것은 다음이다.


잉크 주입 방식


만년필을 만년 동안 쓰려면 잉크를 계속 공급해줘야 한다. 여러 가지 방식이 있지만 다음 셋이 대세다.

1. 카트리지 방식: 볼펜심을 교체하듯 잉크가 들어있는 1회용 카트리지를 넣고, 잉크를 다 쓰면 새 카트리지로 교체한다. 편리하다. 하지만 해당 만년필에 호환되는 카트리지만 사용 가능하고 잉크 사용에 제약이 있다. 

2. 컨버터 방식: 잉크를 다 쓰면 컨버터를 꺼내 잉크를 다시 채운다. 해당 만년필에 호환되는 컨버터를 사면 된다.

3. 피스톤 피드 방식: 만년필 자체가 잉크통이 되는 것이다. 만년필을 직접 잉크통에 담가 잉크를 채운다. 앞의 두 방식보다 잉크를 많이 담을 수 있다. 


모닝페이지를 쓸 목적이기 때문에 피스톤피드 방식이 좋을 것 같았다. 다음 셋으로 추려봤다. 가격대가 천차만별이라 비교의 의미는 없지만.


- 대만 쯔위스비사의 에코 (5만 원)

- 독일 펠리컨사의 M200 (20만 원)

- 끝판왕이라 불리는 독일 몽블랑사의 M149(100만 원 이상)


펜촉(닙) 굵기


펜촉의 굵기는 EF(extra fine), F(fine), M(medium), B(broad) 등으로 구분하는데 뒤로 갈수록 굵어진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는 닙을 선호하는 편이다.  획수가 많은 한자문화권(중국, 한국, 일본)의 경우는 닙이 가늘어야 글자를 제대로 쓸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버터필감을 느끼려면 닙이 좀 굵어야 한다. 일본 제품은 유럽, 미국 제품보다 같은 규격이라도 닙이 더 가늘다고 한다. 


입문하기


만년필의 가격은 천차만별이고 비싼 건 몇백만 원 짜리도 있기 때문에 덜컥 사기 전에 일단 입문을 먼저 해보는 게 좋겠다. 


많이 추천하는 일본 플래티넘사의 프레피 모델을 샀다. 인터넷으로 2,3천 원이면 구입 가능하다. 나는 한가람문구에서 5천원주고 샀다. 배송비 생각하면 마찬가지다. F닙을 골랐는데, 생각보다 가늘다. 그래서 잉크 흐름이 부드럽지는 않은 느낌이다. 대신 잉크가 오래간다. 속이 훤히 보이는 투명 재질이라 저렴해 보인다. 저렴한 건 사실이다. 며칠 써보고 이만하면 됐지 하고, 좀 그럴듯한 만년필을 사겠다고 (성급히) 결심했다.


새 만년필을 살 핑계에 드릉드릉 시동을 걸고 있었더니 남편이 안 쓰는 만년필을 줬다. 내가 사줬다는데 기억이 없다. 근데 왜 자기가 안 쓰고 나를 주는 걸까. ("나는 라미 만년필이 이쁘더라고....") 우리나라에서는 저평가된 미국 크로스사의 풀 실버바디 모델이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썼던 브랜드라고 한다. 펜촉 굵기로 봐선 M닙으로 추정된다. 버터필감이라고 부를만하다. 다만 카트리지가 작은 데다가 잉크가 빨리 닳는다. 다이소에 가면 미용 주사기를 파는데(1천 원), 그걸 이용해서 카트리지를 충전해서 쓰기로 했다. 



잉크와 종이


만년필을 구비하면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잉크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경로의존적이라고 부를 정도다. 잉크 색도 다양하고, 펄잉크 등 종류도 셀 수 없다. 나도 미처 몰랐던 수집욕을 미친듯이 자극한다. 만년필 덕질하는 많은 사람들이 잉크만은 참으라고 하던데. 일단 펠리컨의 기본 블랙 잉크 4001을 샀다. 일본 파이롯트사의 이로시주쿠라는 잉크 시리즈는 자연의 색깔에 빗대어 이름을 붙였다. 내가 산 송로라는 이름의 잉크는 오묘한 청록색이다. 가장자리가 적색으로 변하는, 일명 '적테'가 뜬다고 한다. 잉크만의 매력이라고.



종이도 중요하다. 잉크가 스며들기 때문에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종이가 좋다. 많이 추천하는 건 로디아, 미도리 등인데 가차 없이 가성비가 없다. 가격을 생각하면 다이소의 루즈리프 노트도 쓸만하다고 한다. 


하드코어 한 딥펜의 세계로


만년필에 잉크를 넣는 건 번거롭다. 새 잉크를 넣을 때마다 깨끗이 씻어주어야 한다. 잉크를 편하게 쓰려면 딥펜(Dip Pen)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펜촉을 잉크에 담가(dip) 쓰는 펜이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미스터 다아시가 편지 쓸 때 사용할만한 감성이다. 펜촉이 잉크를 머금을 만큼만 펜이 나오므로, 자주 잉크병에 펜대를 찍어줘야 한다. 만년필은 이에 비하면 부싯돌을 쓰다가 라이터를 켜는 정도의 편리함이다.




펜대에 펜촉을 바꾸어가며 쓸 수 있다. 브라우스사의 펜대를 사고, 펜촉은 대표적 추천템 두 개를 샀다. 브라우스의 스테노닙은 강약을 조절하여 그림 그리기 좋다는데 아직 어렵다. 인덱스핑거닙은 그야말로 검지손가락처럼 생겼다. 잉크 흐름이 균일하여 필기할 때 좋다. 딥펜은 펜촉을 바꿀 때마다 잘 씻어줘야 한다. 인간은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는 존재다. 취향은 점점 하드코어해지고 드디어 글라스펜에 도달했다(!)



'16세기 베네치아 전통인 입으로 불어 만든' 펜이라고 한다. 유리에 모세혈관 같은 수많은 홈이 있어 잉크를 상당히 머금는다.  체감상 딥펜의 세 배 정도. 딥펜과 같은 탄력성은 없다. 흡사 정교한 유리공예를 보는듯한 시각적 즐거움이 있고, 사각사각하는 건조한 필감이 손맛을 준다. 힘을 과하게 주면 부러지지 않을까 하는 긴장감은 덤이다. 오래 잡기엔 불편하므로 주로 캘리그래피에 쓴다고 한다. 


이런 즐거움을 이제야 알게 되다니. 잠시 억울했다가 인연은 때가 있는 거라고 납득한다. 회사에서 결재할 때도 쓰고 다이어리도 쓴다. 아무도 눈치 못 챘겠지만 혼자 흐뭇해한다. 가끔 잉크가 새서 손끝이 까맣게 물들었지만 뭐 어떤가. 편리함과 효율성이 미덕인 시대다. 순간이동하여 목적지에 도착하듯 과정의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만다. 필기하는 소소한 즐거움을 다시 일깨워줘서 고맙다. 만년필에게 만년필로 감사의 글을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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