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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메르인 Feb 23. 2023

다닐 트리포노프 피아노 리사이틀

공연은 완벽했다. 하지만... 

다닐 트리포노프를 이야기하려면 조성진이 우선 나와야 한다. 


조성진이 2015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여 센세이션을 일으키기 전, 17세인 2011년에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3위로 입상해 가능성을 보였다. 이때 우승한 사람이 다닐 트리포노프다. 1991년 러시아 출생으로, 쇼팽 콩쿠르, 루빈스타인 콩쿠르 등 셀 수 없는 상을 수상했다. 2018년에는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앨범으로 BTS도 타지 못한 그래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힘과 스피드, 정확성을 고루 갖춘 육각형의 연주자라고 할 수 있다. 


운 좋게 다닐 트리포노프 피아노 리사이틀의 취소표를 구했다. 무려 D구역의 두 번째 줄이다. C구역은 언감생심이고, B구역이었으면 더 좋았겠지. 그게 이유가 있다. 객석에서 보면 피아노는 건반이 왼쪽에 보이도록 측면으로 놓여있다. (반대의 경우도 있을까? 아직 본 적은 없는데..) 그러면 연주자는 무대의 왼편에 앉게 된다. 객석의 왼쪽에서는 연주자의 등과 연주하는 손을 볼 수 있다. 객석의 오른쪽에서는 연주자의 표정을 볼 수 있지만, 피아노에 가려 손은 보이지 않는다. 가운데에서 왼쪽으로 살짝 치우쳐 앉으면 연주자의 옆얼굴과 연주하는 손을 동시에 볼 수 있다. 대체적으로 손을 보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피아노 리사이틀은 왼쪽이 더 비싸다. 아래에 있는 이 공연의 좌석배치표를 보면 이해가 빠르다. 1층을 예로 들면 R석이 왼쪽 가장자리인 A구역 절반까지 해당된다. 



연주하는 현란한 손을 보고 있노라면 이게 과연 사람이 가능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속주 때는 문자 그대로 '손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양쪽에 다 앉아 본 결과 역시 손을 보는 쪽이 더욱 재미있다. 물론 표정을 감상하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 공공장소에서 성인이 감정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보는 것은 드문 일이니까. 몰입한 연주자는 희열에 넘친 나머지 괴로워한다. 




드디어 무대 왼쪽에서 다닐 군이 나왔다. 유튜브에서 봤던 것보단 왜소했다. 머리카락은 연한 갈색으로, 층지게 자른 머리는 목덜미까지 뻗어있었다. 머리카락은 유난히 가늘어 힘없이 얼굴의 윤곽을 감싸고 있었다. 얼굴의 아래쪽 반은 수염이 수북했다. 


감색의 슈트, 흰색 와이셔츠에 자주색 타이를 맸는데, 뭔가 후줄근해 보였다. 그 복장 그대로 러시아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나 했다. 한국산 초코파이를 수입하러 온 비즈니스맨이라도 해도 손색없었다. 재킷도 구김이 가 있었고, 특히 바지 오금 부분은 아코디언모양으로 주름이 진하게 몇 겹 나 있었다. 바지 통이 좁아지는 스타일이라 발목 주위에서 걸려 밑단이 곧게 펴지지 못했다. 세계적인 명성을 감안할 때 돈은 넘쳐날 텐데....  


연주만 잘하면 되지 패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듯이 다닐 군은 거침없이 첫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프로그램은 다섯 곡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 차이콥스키의 어린이를 위한 앨범 OP. 39 


프로그램북-연주자와 곡 설명을 곁들인 열 쪽 내외의 팸플릿. 공연장에서 4천 원 정도에 판매한다-을 보고 차이콥스키의 풀네임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흡사 러시아 격투기 선수 같은 이름이다. 이 곡은 원래 연주곡은 아니고 슈만 풍의 간소한 작품을 쓰고 싶다는 차이콥스키의 바람으로 탄생했다. 총 스물네 곡의 짧은 소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설명대로 이 곡은 좀 심심했고, 기어이 듣다가 졸았다. 다닐 군의 현란한 연주를 기대했기 때문에, 간이 안된 캐비어 알탕을 먹는 기분이었다. 



2. 슈만 판타지 다장조 OP. 17


1악장 - 매우 환상적으로 열정적으로

2악장 - 적당한 빠르기로 힘차게

3악장 - 느린 템포로 일정하게 조용함을 유지하면서


여러 악장으로 이루어진 곡은 완급 조절이 중요하다. 보통은 중-약-강의 구성인데, 강-중-약으로 점점 하강하는 구성이 인상적이었다. 



인터미션 후 다닐 군이 다시 나왔다. 혹시나 옷에 스팀다리미라도 하고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대로였다. 지난번 손열음 리사이틀에서는 중간에 아예 옷을 갈아입던데. 다닐 군은 음악을 들려주러 나왔지, 외향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려나보다.



3. 모차르트의 환상곡 다단조 K. 475


모차르트는 금욕적이다. 폭주해 봤자 기관차다. 레일을 벗어나지 않는다. 단추를 목까지 꽉 채우고, 눈은 웃으면서 입으로 욕하는 신사 같은, 그의 환상곡은 나에게 그런 이미지다.



4.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 M. 55


가장 기대했던 곡이다. 라벨 특유의 비장한 서정미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곡은 세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1. 물의 요정(Ordine) - 컵에 물을 채우고 마구 흔들지만 물은 쏟아지지 않게 가까스로 절제하는 느낌이다

2. 교수대(Le Gibet) - 음을 쓰는 게 매우 인색하다. 같은 음이 반복되고 멜로디도 절제되어 있다.

3. 스카르보(Scarbo) -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작은 요정이라고 한다. 이상한 화음이 나오다가 트레몰로-한 음을 마구 연타하는 주법-으로 마구 몰아친다. 그러다가 라벨 곡답게 곡이 갑자기 끝난다. 오늘 공연의 하이라이트다.  



5. 스크랴빈의 피아노 소나타 5번 OP. 53


이런 이름의 작곡가도 있었나. 프로그램북은 '신비와 광기의 대비가 불안을 머금은 채로 전시되면서 조금씩 그 강도를 높여' 나가다가 '잠시 이어지는 고요한 침묵 뒤로' '번쩍이는 듯한 광채를 발산하는 화음의 연타가 이어'지다가 '서두의 주제를 재빠르게 제시한 뒤 끝난다'라고 묘사한다. 역시 반음계와 불협화음이 많이 나온다. 



가장 기대하던 순간이 왔다. 두 손을 곱게 모으고 앙코르곡을 기다렸다. 굉장히 익숙하지만 이름은 알 수 없는 잔잔한 곡을 연주했다. 내심 초절기교 연주곡 중 4번인 마제파를 기대했기에 실망했다. 앞 연주에서 미처 힘을 빼지 못해서인지 약간 탁하게 들렸다. 두 번째 앙코르곡은 좀 빠른 곡을 해주려나 기대했는데, 다닐 군은 박수갈채 속에서 숫하게 등장-퇴장만을 반복하다가 쏙 들어가 버렸다. 이게 끝인가? 다른 리사이틀에서는 최소 두세 곡은 했었던 것 같은데...


연주는 좋았다. 그의 주름진 양복과 단출한 앙코르가 좀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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