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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메르인 Mar 24. 2023

당근마켓에서 배우는 수요공급의 법칙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가장 잘 적용되는 장소는 아이들의 방이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자연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나아간다고 한다. 잉크를 물에 한 방울 떨어뜨리면 잉크는 점점 물속으로 확산된다. 아이들의 방도 마찬가지다. 청소를 하면 뭐 하나. 오래간만에 들여다보면 여지없이 쓰레기장이 되어있다. 벗어서 뒤집어놓은 옷들, 떡볶이 먹고 버린 종이컵, 다 먹은 과자 봉지, 그림 그린 종이들, 바닥에 널브러진 책들, 간식 먹은 그릇도 방치되어 있고, 놀잇감은 왜 이렇게 많은지...


새 학기가 왔다. 봄바람이 솔솔 불어오기 시작하면 한번 또 뒤집을 때가 온 것이다. 아이들에게 대청소를 하게 했다. 처음엔 저항하던 아이들도 엄마가 물러나지 않을 태세란 걸 본능적으로 알고 미적미적 방으로 들어갔다.


이번의 집중 목표는 안 읽는 책이었다. 특히 별렀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전집 50권을 비웠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즐겨 읽었는데, 이젠 표지도 많이 낡은 데다가 만화백과는 좀 졸업하자는 취지였다. 이걸 누구 주나 싶어 재활용할 때 내놓기로 했다.


아니면... 밑져야 본전이니 당근 마켓에 팔아볼까? 본문은 멀쩡하고 표지만 좀 찢어진 상태였다. 잘 손봐서 싸게 내놓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1. 시장조사


일단 팔릴만한 물건인지 알아야 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으로 검색해 보니 내가 사는 XX동 외 56개 동네에서 14건이 나왔다. 이 중 거래 가능은 4건이다. 즉, 10건이 거래완료라는 것이다. 전집류는 가격이 비교적 고가이고 특정 시기에만 필요하므로 중고 공급 및 수요가 많다. 이 정도 유동성을 감안하면 거래성사가 가능할 것 같았다. 이제 가격조사를 해보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정가는 권당 1만 1천 원이다. 50권이면 55만 원이다. 거래완료건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21만 원 - 박스채 미개봉 상품

2. 20만 원 - 총 64권 (와이 몇 권 덤)

3. 17만 원 - 상태 최상, 문제집 200권 덤

4. 15만 원 - 새책 수준, 와이 16권 덤

5. 10만 원 - 책꽂이에 꽂아만 놨음. 책 펼치면 찍 소리 날 정도로 사용감 없음

6. 3만 8천 원 - 상태 최상 19권(와이 2권 덤)

7. 3만 5천 원 - 29만(와이 2권 덤)

8. 2만 원 - 이건 만화백과가 아니고 부록 문제집 200권임

9. 9천 원 - 9권

10. 나눔 - 2권


새책 수준이면 10~20만 원 사이에서 거래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용감이 있는 경우 5만 원이 적정선인 것으로 보인다. 엄마가 뭐 하나 하고 옆에서 얼쩡거리는 둘째 아이에게 물었다.


"너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라고 알아?"

"아뇨"

"브리태니커 만화백과를 팔고 싶은 사람은 비싸게 팔고 싶어. 비싸게 팔리면 더 많은 사람들이 팔려고 하겠지. 이건 공급의 법칙이야. 사는 사람은 싸게 사고 싶지. 싸게 팔리면 더 많은 사람들이 사려고 할 거고. 이건 수요의 법칙이라고 해. 파는 사람, 사는 사람 둘이 가격이 맞아야 거래가 이뤄지는 거야. 이걸 수요공급의 법칙이라고 해. 그러니까 내가 비싸게 올려도 그 가격에 누가 안 사면 소용없어. 그래서 나는 가능한 싸게 올릴 거야"


빠른 거래를 원한다면 미련 없이 가격을 후려쳐야 한다. 3만 원에 올리기로 결정했다.


2. 거래하기


우선 사진을 찍기 위해 매물을 보수했다. 스카치테이프를 잘라 찢어진 표지에 붙이는 단순작업이었다. 집에 있는 유휴 노동력을 활용키로 했다. 둘째 아이를 조수로 고용했다. 보수는 아이스크림 한 개였다. 다 고쳐놓으니 꽤 말끔해졌다. 책 상태를 상세히 보여주려고 사진을 이런저런 각도로 많이 찍었다.

"애들이 즐겨봐서 사용감 꽤 있어요. 상태 감안해서 가격 책정했어요"

라고 썼다. 긴장되는 손으로 당근마켓 앱의 올리기 버튼을 눌렀다.


올린 지 얼마 안 되어 세 명이나 문의가 왔다. 첫 번째 사람이 책 상태를 묻더니 바로 거래하겠다고 했다. 옆에서 보던 둘째 아이가 "한 장 찢어진 거 있어요"하고 실토를 했다. 거래에서는 정직이 생명이라고 믿는다. 찢어진 페이지를 찾아서 사진을 보냈다. 그래도 괜찮다고 했다. 토요일에 동네에서 직거래하기로 했다. 두 번째, 세 번째 사람에게는 "이미 예약하신 분이 있으니 불발되면 연락드릴게요"라고 메시지를 날렸다. 첫 번째 거래가 무산될 것을 대비한 백업이었다.


토요일이 왔다. 책이 오십 권이나 되기 때문에 무게가 상당했다. 박스 두 개에 나눠 넣고 카트에 올렸다. 아이들에게 무거우니 같이 가자고 했다. (그즈음 남편은 물건을 팔러 동남아로 출장 중이었다.) 중고거래도 경험이니까 참여하면 좋을 것 같았다. 아이 둘이 번갈아 카트를 밀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아이들이 쭈뼛쭈뼛하게 물었다.


"엄마, 다른데 가 있으면 안 돼요?"

"왜, 부끄럽니?"

"네......."


그래. 그 나이에는 부끄러울 수 있지. 둘째 아이는 근처 육교에 올라가 멀리서 관망했고, 첫째 아이는 아예 어디론가로 가버렸다. 나 혼자 카트 옆에서 멍 때리며 거래 상대방을 기다렸다.


5분 뒤 SUV 한대가 다가왔다. 선글라스를 낀 여성이 운전석에서 내리자마자 내 손에 황급히 만원 짜리 세장을 쥐어주었다. 이윽고 다급한 손길로 트렁크를 열어 상자를 싣기 시작했다. 좀 버거워하길래 내가 도와주려고 했는데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SUV는 곧바로 휑하니 떠났다. 아마 상대방도 우리 애들만큼 부끄러웠던 것 같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은 나 하나인가.


3. 거래 그 후...


집에 돌아오니 둘째 아이가 슬며시 실바니안패밀리의 핑크색 자동차를 내밀었다.


"엄마, 이건 안 갖고 노는 건데 버리기는 싫어요. 이것도 팔아보면 안 돼요?"


브리태니커 만화백과가 팔리는 걸 보니 자기 것도 되지 않을까 했나 보다. 버리는 죄책감은 싫지만 남한테 줘서 남이 버리는 것은 괜찮단다.


이건 좀 더 자신감이 있었다. 브리태니커 만화백과와는 달리 사용감이 거의 없었다. 내 눈에 예뻐서 사준 건데 아이들이 많이 갖고 놀지 않았다. 역시 놀잇감은 부모가 맘에 든 걸 사줘 봤자 소용이 없다.


실바니안으로 검색했다. 이것도 매물이 꽤 나왔다. 전집류 대비 거래성사율은 높지 않았다. 설명을 자세히 쓰고 1만 5천 원에 올렸다. 매물을 올리고 몇 시간이 지나자 메시지가 왔다.


"반값택배 가능한가요?"


그게 뭐지? 재빨리 네이버에서 검색했다. 편의점에서 편의점으로 배달하는 택배서비스란다. 가격이 일반 택배 대비 저렴하고(2천 원 내외), 수신처를 편의점으로 하기 때문에 주소가 노출되지 않는다. 그래서 중고거래에서 많이 선호되는 것 같았다. 앱에서 택배신청을 미리 하고 동네 GS25로 향했다. 역시 둘째 아이를 데리고 갔다.


"제가 왜 같이 가야 하는 거예요?"

"너의 놀잇감이었으니까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해야지."


편의점 내에 있는 단말기에서 운송장을 출력하여 박스에 붙이고 측정된 무게에 따른 요금을 납부하면 된다. 앱을 통해 운송 현황을 확인할 수 있다. 삼일 뒤 물건이 무사히 픽업되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처음에는 기세가 등등하여 '집에 있는 거 다 당근마켓에서 팔아버리겠어!'라는 마음가짐이었으나 거래의 전 과정을 겪어보니 준비과정을 비롯, 특히 흥정에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어 거래 두 번 만에 방전되고 말았다. 이럴 바에는 애초에 물건을 살 때부터 신중해야겠다는 교훈으로 급 마무리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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