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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메르인 Aug 12. 2024

도심을 질주하는 마라톤의 참맛

2024 조선일보 서울하프마라톤 참가하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건 XX파이뿐만이 아니다.


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 방향 전동차. 운동복 차림의 남녀가 삼삼오오 들어선다. 초면이지만 괜히 친근하다. 당신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마라톤 대회에 가는 중이군!


지난 서울마라톤은 겨우내 제대로 준비를 못한 탓에 가까스로 완주했다. (https://brunch.co.kr/@sumerians/80) 잠실 일대를 맴돌았던 단조로운 10킬로미터 코스도 아쉬웠다. 그러던 차에 알게 된 게 이 대회다.


10킬로미터 코스가 군침 돌았다. 광화문 서울광장을 출발해 시청, 충청로, 공덕, 마포를 지나 마포대교를 건너 여의도공원을 한 바퀴 돌고 끝난다. 하프코스 선수들은 여의도에서 멈추지 않고 한강을 따라 양화대교를 건너 상암 월드컵공원 평화광장에서 끝난다. 




광화문역에서 내려 자연스레 사람들을 따랐다. 지하철 역사 내 화장실에는 벌써 백 명 이상이 줄 서 있었다. 넓은 경사로를 오르니 광화문광장으로 연결되었다. 멀리 보이는 북악산과 이순신, 세종대왕 동상을 배경으로 빼곡히 들어찬 선수들이 보였다. 


마라톤대회에 임하는 내 징크스는 두 가지다. 


첫째, 아침에 일어나서 대변을 봐야 한다.

둘째, 경기 시작하기 직전 소변을 봐야 한다.


한 시간 넘게 뛰므로 생리현상을 해결해 두는 게 중요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밥을 먹으니 신호가 왔다. 첫 번째 징크스는 무난하게 해결했다. 광화문역에 도착할 때만 해도 바로 뛸 건데 화장실을 또 갈 필요가 있을까 했다. 


내가 미처 생각 못한 건 출발시간이었다. 2만 명이나 참가한 대회다 보니 출발하는 조가 많았다. 이번 대회는 모든 참가자가 광화문에서 출발했다. 하프 부문 3개, 10km 부문 4개 등 총 7개 조였다. 나는 기록을 제출하지 않아 맨 마지막조였다. (어차피 내 기록으론 제출해 봤자 마지막조...) 지난 서울마라톤은 풀마라톤 코스와 10km 코스의 출발지가 달라 덜 혼잡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서 화장실을 해결하지 않으면 망하겠구나 했다. 혹시나 덜 혼잡할 것 같은 세종문화회관 지하 화장실로 향했다. 역시나 수십 명이 줄을 서 있었다. 참가인원 2만 명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 하프 부문의 첫 번째 조는 이미 출발했다. 일단 화장실 줄 맨 뒤에 섰다.


남자 쪽은 줄도 짧았지만 어찌나 금방금방 나가던지. 남편을 출발지로 보내서 내가 속한 D조가 출발할 기미가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 설마 늦었다고 출발 못하게 하면 어쩌지? 시간이 되면 화장실을 포기해야 하나? B조가 출발했다고 남편이 알렸다. 아, 열명쯤 남은 거 같은데.. 


그래도 모든 기다림에 끝은 있다. 겨우 화장실에 들어섰다. 줄이 더디게 빠진 이유가 있었다. 화장실은 네 칸인데 두 칸이 막혀있었다. 그래, 큰 거 신호가 올 수도 있지... 너무 많이 싸서 변기가 막힐 수도 있지... 사람이 많이 모이는 대회는 자연재해가 있기 마련이다. 


돌아오니 D조가 막 출발하려는 참이었다. 맨 뒤에 서서 가볍게 제자리 뛰기를 했다. 앞에선 오세훈 시장과 장미란 차관 등 유명인사가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오시장이 갑자기 재킷을 벗더니 연단 아래로 내려갔다. 사회자가 놀란 척을 하며 "시장님이 어디 가셨죠?"라고 대본을 읽었다. 마지막조인 우리 조에서 같이 뛰는 모양이었다. 장미란 선수는 맨 오른쪽을 지나는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었다. 나도 그 뒤에 섰다. 좋은 기운을 받고 싶었다.


출발사인이 울리자 선수들이 세종대로로 쏟아져 나왔다. 가장 도파민이 도는 순간이다. 


함께 달린다는 것의 의미는 무얼까.


선사 시대, 인간은 자신보다 덩치가 큰 매머드를 사냥하려 한다. 한 마리면 며칠간 무리가 배불리 먹을 수 있다. 혼자서는 당해낼 수 없지만 여럿이 힘을 합치면 된다. 도망가는 매머드를 인간이 무리를 지어 쫓아간다. 같이 뛰는 소속감과 흥분감은 먼 옛날부터 생존의 DNA를 타고 내려온 본능과도 같지 않을까,


라는 뻘 생각을 선수들의 뒤꽁무니를 쫓아 뛰며 하는 것이다.


"걷기보다 느리게 뛰기 클럽"의 창시자로서, 대회 때마다 두려워하는 건 제한시간이었다. 


도심 곳곳을 통제하는 대회는 마냥 기다려주지 않는다. 10km 대회라면 통상 1시간 30분 이내에 결승점에 도착해야 한다. 게다가 구간별로 통제시간이 정해져 있다. 제한시간을 초과한 참가자는 주최 측이 준비한 회송버스에 탑승할 것을 권유한다고 안내한다.


내 평소 기록은 1시간 25분 정도였다. 별일이 없으면 제한 시간 이내에 들어올 테지만, 구간별 통제시간이 마음에 걸렸다. 간밤에도 회송버스에 따라 잡히는 망상으로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우려와는 달리 출발이 나쁘지 않았다. 지난 대회와는 달리 연습을 꽤 해서 그런지 몸이 가볍게 나갔다. 8차선의 대로를 달리는 기분은 상쾌하다 못해 통쾌했다. 선수들을 위해 도로가 통제되고 차들이 대기하는 것을 보니 으쓱해졌다. 시야가 넓어서인지 발이 쓱쓱 나가는 기분이었다. 중간중간 버스킹 공연이 준비되어 응원을 해줬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뒤를 돌아보며 회송버스가 따라오는지 확인했다. 서소문 쪽만 약간 오르막이 있었을 뿐 경로는 편편했다. 특히 공덕 쪽에 이르자 마포를 넘어 강을 건너 여의도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완만한 내리막이었다. 5km 지점도 물 흐르듯이 통과했다.


여의도에 이르자 피로감이 올라왔다. 많은 주자들이 퍼져서 걷고 있었다. 특히 여의도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 마지막 코스는 버거웠다. 그럼에도 느리지만 꾸준히 달렸기에, 걷는 선수들을 꽤 제친 것은 소소한 성취였다. 


무난하게 완주했다. 기록은 1시간 16분. 지난번보다 6분이나 단축했다. 컨디션도 나쁘지 않았지만 공덕-마포의 내리막 코스덕이 더 크겠지. 


다음에 나갈 대회는 3대 마라톤 중 하나라는 JTBC 서울 마라톤이다. 11월 초라 까마득하지만, 제한시간이 1시간 20분이라 기록을 단축시켜야 하는 숙제가 있다. 그때까진 마의 계절인 여름을 지나야 한다. 겨울에는 차라리 뛰면 몸이 데워져 할만한데, 여름엔 러닝을 어떻게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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