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라면

아버지의 라면

by 송연

내가 열 살 무렵의 일이다.

그 해 겨울 어느 날 우리 가족에게 평생 잊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그날도 남도의 여느 겨울날처럼 날씨가 맑고 쾌청한 날이었다.


부모님은 일찍 배를 타고 바다로 미역을 베러 나가시고 겨울방학이라 집에 남은

아이들은 동네 친구 집에 놀러도 가고 각자 볼일을 보러 나가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조용하고 고요하기만 한 마을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불이야, 불이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뛰쳐나와 불이 난 곳을 바라보며 두리번거리며 웅성대고 있었다.

나는 돌이 아직 안된 어린 막냇동생을 보며 친구들과 놀다 놀라서 나와보니

불이 난 곳은 바로 꼭대기 집 우리 집이었다.


부모님은 아직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터였다.

우리 남매들은 불이 나서 활활 타고 있는 집을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며 울고 있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모두 합심하여 일사불란하게 불을 끄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양동이를 들고 나와 우리 집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우물에서 양동이에 물을 길어

머리에 이고 나르며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잠재우기에 바빴다.


몇몇 사람들은 집안에서 이불이며 장롱이며 세간살이를 마당으로 전부 끄집어내 옮겼다.

동네 사람들의 몸을 사리지 않은 각고의 노력으로 다행히 불은 집 전체를 태우기

전에 땔감을 쌓아둔 헛간만 태우고 끌 수가 있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 우리 집에 불이 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놀라고 겁이 났다.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기분으로 서럽게 울고만 있었다.

내 등에 업힌 젖먹이 막냇동생도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따라 울고

보챘다.


부모님이 바다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불이 다 꺼지고 난 후였다.

엄마가 새벽에 바다에 나가기 전에 아궁이에 재를 퍼서 담아 놓은 자루에서

불씨가 살아나 헛간으로 불이 옮겨 붙어 난 것이라고 했다.


부모님은 우리 집 불을 끄느라 고생한 마을 사람들에게 술과 음료수를 대접했다.

우리 가족은 다 함께 불로 그을린 집을 대충 청소하고 마당에 옮겨놓은 짐들을

정리했다.


우리 집이 화재로 타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놀라 겁에 질려 우는 아이들에게

부모님은 괜찮다고 다독여 주셨다.


그날 저녁 엄마는 형편이 어려워 1년에 한두 번 먹을까 말까 하는 라면을

식구 수대로 한 봉지씩 사 와서 항상 먹던 보리밥 대신 저녁식사로 준비했다.

우리 남매들은 가게에서 라면 상자를 머리에 이고 오는 엄마를 볼 때부터 들떠

있었다.


엄마는 큰 솥에 물을 끓여 사 온 라면을 몽땅 넣었다.

잘 삶아진 꼬불꼬불한 라면을 한 대접씩 떠 주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평소 술을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마을 어딘가에서 낮에 난 불 때문에 속상한 마음을

술로 달래고 계실 것이다.


그날 저녁 우리는 무어라 쉽게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맛이 나는 라면으로 특별한

저녁을 먹었다.

엄마는 늘 그랬듯이 아직 오지 않은 아버지의 몫으로 라면 한 대접을 따로 담아

놓았다.

술에 얼큰하게 취한 아버지가 힘이 빠진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들어오셨다.


엄마가 아버지 저녁 식사로 남겨놓은 퉁퉁 불어 버린 라면 한 대접을 상에 차려왔다.

아버지는 말없이 불은 라면을 후루룩 후루룩 입안으로 삼켰다.

낮에 난 불로 곳곳에 베여있는 그을음 냄새와 함께 라면을 드셨다.

그리고는 엄마와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우리 집이 부자가 되려고 불이 난 것이라고, 앞으로 더 크고 좋은 집으로 이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아버지가 불은 라면을 먹으며 가족들에게 다짐하듯 한 말은 불안한 가족들에게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안정제가 되었다.


그로부터 1년 후에 우리 집은 꼭대기 집에서 마을 아래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지금도 꼬들꼬들하게 바로 끓인 라면을 먹을 때면 그날 저녁 아버지의 라면이 떠오른다.


엄마는 왜 라면 한 봉지를 남겨두었다가 아버지가 오시면 끓여주어도 되었을 텐데

한꺼번에 라면을 끓여야만 했을까.

아마도 아궁이에 불을 지펴 라면을 끓여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이기도 하고

라면을 자주 먹어보지 못해서 조리법에 익숙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슬프고도 웃음이 나는 아버지의 라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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