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고구마
완도에서도 한 시간 남짓 배를 타고 들어가야 닿을 수 있는 나의 고향은 다도해의 작은 섬이다.
50여 년 전 내가 태어날 무렵 육지와는 10년도 넘게 문명이 낙후되어 동시대 육지에서 살았던 비슷한 세대는 경험하기 어려운 일들을 참 많이 겪으면서 살았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무렵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석유기름을 넣은 호롱불을 켜고 살았던 일들을 말하면 사람들은
잘 믿지 못하는 눈치다.
30년 넘게 서울에서 살면서 문득문득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그 시절이 너무 아득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지금은 운송수단이 발달하여 섬에서 사는 불편이 많이 줄었지만 그때는 섬에 육지로 나가는 배편도 드물고 물자가 귀해서 먹는 것도 대부분 섬에서 나는 해산물과 농작물로 자급자족하며 살았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9남매나 되는 대가족인 우리 집은 엄마의 부지런함과 아이들을 생각하는 극진한 사랑이 더해져 그래도 늘 간식거리가 있었다.
엄마는 철철이 그곳에서 나는 다양한 재료로 엄마의 손맛이 느껴지는 간식을 만들어 한참 자라나는 아이들의 허기를 채워주었다.
보리개떡, 쑥떡, 팥찐빵, 술밥, 미숫가루, 시달캐미 팥범벅.... 그중에서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 꼭 한 번은 다시 먹어보고 싶은 그리운 음식이 있다.
생고구마를 잘라 말린 시달캐미로 팥과 함께 버무려 만든 특별히 정해진 이름도 없는 고향에서만 먹었던 엄마의 요리였다.
고구마의 포근함과 팥의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어우러져 엄마의 따뜻한 사랑이 저절로 느껴지는 맛이었다.
그 맛있는 음식의 재료인 시달캐미를 만드는 과정은 참 많은 시간과 손길이 필요했다.
고구마를 수확하는 11월이면 동네에 일가친척 몇 집이 모여 품앗이로 돌아가면서 고구마 캐는 일을 함께 했다.
아버지가 고구마가 심어진 밭고랑을 한 고랑씩 늙은 누렁이 소를 앞세워 쟁기질을 해나가면 농번기로 방학을 맞은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동원하여 그 뒤를 소쿠리를 들고 줄줄이 따랐다.
소쿠리에 고구마를 주워 담아 밭 한 곳에 고구마를 모아 산더미처럼 쌓았다.
가끔, 쟁기질을 해야 하는 막중한 업무를 맡은 아버지가 좋아하는 약주를 과하게 드시고 난 후 비틀거리며 쟁기질을 하시는 날엔 화가 난 엄마의 거친 잔소리가 함께 위태위태한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일을 하다 날이 저물고 배고픔이 더해지면 밭 한쪽에 치워둔 마른 수숫대나 콩대로 불을 피워 고구마를 구워 먹기도 했는데 그때의 군고구마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고구마 캐는 일이 끝나면 그다음은 절강이라는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절강기계에 생고구마를 한소쿠리씩 넣고 경운기에 시동을 걸 듯 손잡이를 힘껏 돌리면 고구마가 얇고 납작하게 썰어져서 나왔다.
밭에 그물을 펴고 얇게 잘린 고구마를 펼쳐 널었다.
갑자기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온 식구가 밭으로 뛰어가 절강고구마를 걷느라 바빴다.
늦가을 내내 바람과 햇볕에 잘 말린 딱딱한 고구마를 시달캐미라고 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고구마 빼떼기 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 같다.
어렸을 때는 그 일을 하면서도 시달캐미가 어떻게 쓰이는지 몰랐지만 소주를 만드는 주정의 원료로 쓰여 농협에서 모두 수매하여 돈벌이가 귀한 그 시절에 소중한 수입원이 되었다고 한다.
고구마는 지금 생각해 보니 어릴 적 고향에서 우리에게 참 많은 먹거리와 돈벌이를 제공해 준 고마운 농작물이었다.
겨울이 되면 집집마다 방안 벽장이나 방 한구석에 거적을 치고 저장해 둔 고구마를 쪄서 매일 점심으로 먹었다.
어쩌면 어릴 때 너무 많이 먹었던 음식이라 어른이 되면 질릴 법도 한데 지금도 여전히 고구마를 너무 좋아해서 즐겨 먹고 있다.
섬의 한겨울은 김과 미역을 채취하는 일로 쉴 틈 없이 바빴다.
부모님은 바다가 잔잔한 날에는 미역을 채취하러 바다에 나가셨다.
어쩌다 일이 없는 날이면 엄마는 아이들에게 별식을 만들어 주셨다.
엄마는 시달캐미를 먹거리가 귀한 한겨울이나 초봄까지 먹을 요량으로 넉넉히 광에 있는 항아리에 보관해 두었다.
큰 가마솥에 시달캐미와 삶은 팥을 달달하게 버무려 장작불로 푹 삶아 한 양푼씩 퍼 주면 우리는 양껏 맛있게 먹고 배를 채우고 그 무엇도 부러울 것 없는 만족감으로 행복해했다.
그때는 껌이나 사탕 하나도 여러 쪽으로 나누어 먹을 만큼 과자나 간식이 귀해서 어쩌다 엄마가 만들어 주신 시달캐미 팥범벅 요리는 별미 중에 별미였다.
없는 살림에 먹을 것이라도 풍족히 해주고 싶은 자식들에 대한 엄마의 애틋한 마음이기도 했다.
엄마는 지금도 혼자서 고향에 살고 계신다. 여든이 훌쩍 넘은 고령에도 밭에 마늘, 고추, 참깨, 콩, 팥과 같은 농사를 지어 자식들에게 똑같이 나누어 보내 주신다.
아쉬운 것은 더 이상 고향의 달콤한 고구마를 맛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떠나고 한적한 섬의 우거진 숲에 멧돼지가 번식하여 밤이면 마을로 내려와 고구마나 농작물을 모두 헤집고 먹어 치우는 바람에 더 이상 고구마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떠나고 없는 텅 빈 고향집을 홀로 쓸쓸하게 지키고 계시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시달캐미 팥범벅 레시피를 다시 물어본다.
어느새 그때로 돌아가 한층 밝아진 엄마의 목소리는 어린 시절 어느 겨울날의 고향집 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
햇빛이 유난히 반짝였던 바다, 사람과 술을 좋아하시던 아버지, 착하고 순수했던 우리 9남매, 그리고 엄마와 고구마.... 그때의 추억이 선명하게 떠올라 지독한 그리움으로 허기진 마음을 이제는 구운 고구마로 달래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