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꽃밭을 산책합니다
메마른 꽃밭을 산책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K.
몇 년 전부터 1월 1일 모두가 새해 인사를 나누었는데도 음력 설에 다시 새해인사를 나누는게 어색한건 저뿐인건지 궁금해집니다. 마치 식당 입구에서 '어서오세요' 인사를 받았는데 자리에 앉기도 전에 '어서오세요' 인사를 다시 받는 기분입니다. 그래도 좋은게 좋은거라 했지요. 기쁨을 나누고 행복을 나누고 소망을 전하는 인사와 마음이 과한것은 나쁠게 없겠습니다.
올 설에는 고향에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말리는 일을 구태여 할 것도 아니거니와 아닌척 아무리 노력한다고해도 나의 가족들에게 죄스럽고 부끄러워지는 마음을 감추기가 점점 힘들어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K 당신도 코로나라는 불안을 몹시도 꺼려했으니 나와는 다른 이유로 가족과 조촐히 명절을 보냈으려나요. 어딘가 떠나거나 친척들과 만나지 않았더라도 가족들과 함께하는 하루가 편안하고 즐거운 당신이니 어떤 모습으로든 잘 보냈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은 조카들과 에버랜드를 다녀왔습니다.
용인으로 이사를 오게되니 예전 당신의 집에서 한강공원으로 나들이 나가듯 마음의 부담없이 가볍게 다녀올 수 있어 참 좋습니다.
사실 전날 밤 당신과 다녀왔던 어느 4월 봄날의 놀이동산 사진을 조금 훔쳐보았습니다. 우리가 남긴 모든 사진들이 그렇듯 참 행복해보였습니다. 물론 오늘 괜한 짓이었다는 후회를 깊이 하게되었지요. 우리가 걸었던 모든 기억이 너무 선명해져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당신과 함께했던 봄날의 정원엔 꽃이 가득 피어있었는데 오늘 겨울의 정원과 모든 길에는 앙상하게 메말라 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조차 메마르게 들려옵니다. 메마른 풍경에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오랜 놀이기구의 부끄럽게 숨겨진 녹슨면이 도드라져 보이고 겹겹이 페인트칠을 해왔을 난간의 칠이 떨어진 구멍이 현미경으로 보듯 눈 속으로 한가득 채워져버렸습니다. 사파리의 동물들마저도 슬프고 슬퍼 눈물이 메마른 아이들처럼 보입니다.
아쉽고 또 아쉽습니다. 오늘이 참으로 아쉽습니다.
나는 알고 있으니까요. 지금의 메마름은 겨울이 데려온 봄의 새싹을 준비하는 웅크림이 아님을요.
당신과 함께한 풍경이 그날의 봄만이 아니었음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봄도 여름도 겨울도 모두 왔음에도 그 모든 풍경은 메말란던 적이 없음을 나는 알고 있기에 벅찬 감동 대신 짖눌린 우울과 강압적인 대화를 하고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정원의 모든 꽃과 거리의 모든 풀잎과 놀이동산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당신이었음을. 당신이 모든 것이고 세상은 K 당신으로 채워져 있기에 아름다웠습니다. 정원 속 꽃으로 가득 찬 집에서 당신이 앉아있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꽃밭의 한 가운데서 미소짓던 당신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추억합니다.
이곳에도 분명 봄은 오겠지요. 하지만 피어난 꽃이 가진 천연의 색으로도 나를 감싸는 메마름을 이겨내지는 못할겁니다. 오직 당신의 부재로 인해서말이지요.
집으로 돌아온 지금 나는 다시 사진을 꺼내어봅니다.
메말라 부스러질 나를 적시는 한 방울의 눈물을 찾기위해서요
미안합니다.
오늘도 편지가 너무 우울하고 원망스러운 이야기로 가득차버렸네요.
당신이 미안해하던 일을 내가 하고 있다니 참 부끄럽습니다. 당신의 말을 빌려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하게 만들어 미안합니다. 자신은 없지만 앞으로 아주 평범하고 조금은 즐거울지도 모를 일들을 찾고 살펴보고 당신에게 전해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당신에게 새해의 복이 가득하길 기원하며 오늘의 편지를 마치겠습니다.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