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을 파는 나비
기울이는 맥주잔에 따르는 부끄러움은 나의 몫
투박하게 썰린 양배추를 건지는 나무젓가락의 부끄러움도 나의 몫
하루를 버리는 펜이 써내려가는 부끄러움 또한 나의 몫
부끄러운 일입니다
오늘 하루 벌거벗은 열여섯 아가씨처럼 부끄럽습니다
실은 오늘 하루만이 아닐지도 모를 일입니다
거울에 비춰진 민낯에
숨을 곳 없는 벌판에 홀로 남겨져
외쳐도 듣는이 없음에도
이 처량한 부끄러움은 얼굴을 벌겋게 달아오르게 만듭니다
도망갈 곳이 없는 부끄러움은
끝을 알 수 없는 깍지 속처럼 두렵습니다
백지의 아이가 갑작스레 서른넷의 어른이 되어버린 꼴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떨리는 두 팔로 온몸을 감싸안고 웅크려 앉는 일 뿐입니다
나는 날개를 잃고 하늘을 잃은
땅을 파는 나비입니다
앞발이 반절은 닳아 사라진
모래 알갱이를 밀어치우는
날개를 잃은 다리달린 애벌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