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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수리마수미 Apr 03. 2022

신세계로의 초대

내 삶의 컴퓨터

처음으로 나만의 컴퓨터를 갖게 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서였다. 리포트를 제출해야 하거나 프린트할 자료들은 지인의 집이나 피시방을 전전하며 해결했다. 돈이 있을 때는 컴퓨터의 필요성을 모르는 무지함으로 구입하지 않았고, 필요성을 느꼈을 때는 내 수중에 십 원 한 장도 쓰기 힘든 시절이 되어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시작하며, 신용카드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개월 수로 할부를 하여 나만의 컴퓨터를 장만했다. 그렇게 장만한 컴퓨터에 빠져 밤새는 줄 모르고 온라인 세계에 빠져 여기저기 쑤시고 다녔다. 음악에 시디를 구워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호사도 누려보고, 사랑하는 이에게 우리의 사진이 담긴 달콤한 시디를 선물하기도 했다. 수개월 카드값과 인터넷비를 내기 위해 허덕거리긴 했으나, 종이와 연필로 아날로그 삶을 살던 내게 신세계를 맞보게 해 준 뚱뚱한 나의 첫 컴퓨터는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두 번째 컴퓨터는 엄마의 선물이었다. 뒤늦게 영어를 배워보겠다고 그동안 모은 돈을 탈탈 털어 남의 나라 다녀온 내가 새로 일을 시작하려니 필요한 것은 컴퓨터였다. 나이는 먹고, 돈은 없는 처량한 처지의 딸년에게 쌈짓돈 모은 돈을 털어 노트북을 사주신 엄마, 그 노트북으로 그림 자료들을 찾고, 수업 자료를 만들어 과외를 시작했다. 엄마가 사 주신 검정 노트북은 바닥난 통장을 채워주는 밥벌이 노릇을 톡톡히 해 냈다. 천근만근의 무게를 지닌 노트북은 결혼을 하며 베트남까지 따라와 고된 해외살이의 단비 같은 존재가 되어주었으나, 십 년이라는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장렬히 눈을 감았다.

이후 내게 온 컴퓨터들은 남편이 쓰다 물려준 것들이었다. 유튜브의 영상을 찾아보고, 필요한 자료를 내려받는, 처음 만났던 그 순간에 했던 일들을 수년째 반복적으로 해내는, 이제는 더 이상 신선하지 않는 녀석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루 몇 시간을 매달려 써 내려간 글들은 나의 기록이 되었고, 내가 사는 세상이 다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돌아가신 엄마가 마지막으로 주신 돈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노트북을 사기로 했다. 그리고 하루하루 엄마와의 기억을 찾아 써 내려갔다. 그 글들을 책으로 만들어 나무가 된 엄마에게 보여드리고 싶었다. 책 만드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편집 프로그램들을 배우고, 종일 노트북 앞에 매달려 서툴게 책 만들기를 시작했다. 욕심은 쌓이기 시작하더니 나의 그림을 담은 그림책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하며, 새로운 세상에 또 한 걸음 다가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욕망은 끝이 나질 않았다. 무한한 가능성을 안겨주는 이 기계를 좀 더 제대로 다루고 싶어졌다. 그래서 도전했다. 이십오 년 만에 이력서를 준비했다. 머리도 자르고, 가지고 있던 옷 중 가장 때깔 나는 옷으로 챙겨 입었다. 도전을 기념하는 인증샷도 찍었다. 한 시간가량의 인터뷰가 시작되었고, 결과를 기다리라는 담당자의 안내를 듣고 진정되지 않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지나 전화가 울렸다. 합격이다. 시에서 실행하는 '인공지능 전문강사 배출 교육'에 교육생으로 선발되었다. 한 달 동안 이른 아침부터 오후까지 마라톤 강의를 듣고 시에서 요구하는 컴퓨터 관련 자격증도 따내야 한다. 반백을 향해 돌진하는 나이에 새로운 일에 도전하게 되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가득이다. 괜한 일에 도전한 건 아닌지 하는 후회도 슬쩍 든다. 낙오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배움은 설렘을 안겨준다. 그리고 가슴을 뛰게 한다. 신세계로의 초대를 거부하지 않는 마음만은 늙지 않는 내가 될 것이다. 환호성 지르는 오월을 기다리며, 새로운 일의 시작점인 사월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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