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일에 몸이 매여 자식 돌볼 여력 없던 엄마의 자식 사랑 표현은 촌지를 뿌리는 일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가정방문이라는 이름하에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아이들의 사는 형편을 보는 일은, 어떤 아이가 입에 풀칠께나 하며 살고, 어떤 아이가 그럭저럭 사는지 선생님 눈에 확실히 각인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몇몇 선생들에게는 촌지 뜯을 좋은 기회가 되기도 했다. 요즘이야 이런 소리가 세상 무식한 말이라고 취급도 하지 않겠지만, 국민학교라 부르던 내 어린 시절에는 하얀 봉투 촌지로 내 자식이 학교에서 으쓱대며 지낼 수도, 밉상 덩어리로 찌그러질 수도 있었다.
지금처럼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한두 달이 지난 봄날 즈음이었을게다. 온종일 공장에서 바쁘게 돌아가는 미싱 소리와 실밥을 묻히고 살아야 하는 엄마는, 선생님이 가정방문 오겠다는 말에 울상이 되었다. 이른 아침 일을 나가 해가 떨어져야 집으로 돌아오는 엄마에게, 오후 한나절을 선생님을 위해 내어 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엄마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잠깐 짬을 내어 직접 학교로 가겠노라 했다.
청소 시간, 열린 교실 창문으로 양손에 먹을거리 가득한 비닐봉지 들고, 바삐 걸어들어오는 빨간 원피스의 엄마가 보인다. 공장으로 빨리 돌아가야 하는 엄마는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먹거리들을 선생님 책상에 턱 올려두고, 나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수십 번 되뇌다, 하얀 봉투를 선생님 손바닥에 꾹 눌러 쥐여준다. 씨익 웃으며, 못 이기는 척 돈 봉투를 쓰윽 챙기는 선생님의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청소하던 아이들 역시 그 모습을 고스란히 눈에 담았다.
그날 이후 나는 왕따가 되었다. 선생님에게 돈 준 아이라며 아이들은 수군거렸고, 행여나 내가 선생님께 칭찬을 받거나, 상을 받는 일에 모두가 쌍심지를 켜고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나와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도 하나 둘 핑계를 대며 멀어졌고, 더 이상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 철저한 외톨이가 되었다. 지옥 같던 6학년이 끝나고 중학교 배정을 받아야 하는 날, 나는 반 아이들이 대부분 진학하는 집 앞 중학교로는 가지 않겠노라 했다. 대신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하는 다른 중학교로 가겠노라 말했다. 멀미 심한 내가 왜 그 먼 학교로 가는 이유가 궁금한 엄마에게는 남들 다 가는 곳 대신, 새로운 곳을 경험해 보고 싶다 했다. 나를 위해 촌지를 건넨 엄마에게 내 이야기를 들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촌지 건넨 날 나는 왕따가 되었다.
비록 그 시절의 경험은 유쾌할 순 없으나, 힘든 삶에서도 자식 아끼는 마음 보이려 애쓰는 어미의 모습을 보았기에 지옥처럼 기억하지 않으려 한다. 아이들이 내게 보였던 차가운 마음보다, 나를 아끼는 내 어미의 뜨거운 마음을 알기에 한 번씩 되뇔 수 있는 어린 시절 추억으로 남겨 두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