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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댄 것은 마음이었다.

뜻밖의 시간, 미술관으로

by 수미

중학생 딸이 긴 머리를 싹둑 자르고 돌아왔습니다. 몇 년을 기른 머리였기에 보자마자 속이 다 시원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거울 앞에서 투덜대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붙임머리를 하고 싶다고 졸라댔습니다.

“그냥 놔두면 다시 자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론 복잡했습니다. 외모에만 온 신경을 쓰는 딸이 못마땅하면서도, 이해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딸은 거울 속에서 계속 뭔가를 고치려 애쓰고 있었고, 저는 그 모습이 조금 안쓰럽게 느껴졌습니다.

결국 딸바보 남편이 나섰습니다. 아이의 바람을 들어주겠답니다. 붙임머리는 몇 시간이 걸리고, 비용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딸은 기가 막히게 아빠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고, 결국 원하는 걸 얻었습니다.

한숨이 나왔습니다. 속으론 ‘그 에너지로 공부를 했으면 나라를 구하겠다’는 말이 치밀었지만, 꾹 눌러 삼켰습니다. 정작 아이는 거울 앞에서 진지했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 시기, 딸에게 외모는 자존감의 시작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약된 미용실로 데려다주고 나오는 길, 마음이 묘했습니다. 아이는 자기 표현을 한 건데, 왜 나는 이렇게 복잡할까. 붙임머리 작업은 세 시간이 걸린다고 했고, 저는 근처 대구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뜻밖의 시간, 뜻밖의 여유였습니다. 티격태격하던 아침 감정도 조금은 가라앉았고, 오랜만에 나 홀로 걷는 길이 낯설게 편안했습니다.

전시 중이던 건 아일랜드 작가 샘 스컬트(Sam Scullt)의 작품이었습니다. 멀리서 보면 단순한 수평선과 직선의 반복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선과 선 사이의 여백, 미묘한 질감, 절제된 색감이 주는 안정감이 절묘했습니다. 선 하나로 공간이 살아나고, 여백 하나로 숨을 쉬게 되는 그림들.

그림은 복잡하고 정교해야 한다는 내 안의 고정관념이 무너졌습니다.

화실을 운영하면서 그림은 어느새 생계의 수단이 되어 있었습니다. 학생을 지도하는 일, 양육자들의 요구사항, 늘어나는 고정비 속에서 제 그림은 항상 뒷전이었습니다.

‘잘 그려야 해.’

‘제대로 된 작업을 해야 해.’

이 말들이 매일 제 어깨를 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전시는 조용히 제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덜어내도 괜찮다고.

잠시 멈춰도 괜찮다고.

다시 시작해도 괜찮다고.

못난 그림이라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나만의 선, 나만의 여백을 담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습니다.

화실에선 교육자였고,

집에선 엄마이자 아내였고,

매일 생계를 고민하는 장사꾼이었지만

그 삶의 틈 사이에 예술가인 ‘나’를 한 숟가락쯤 담고 싶습니다.

복잡한 일상 속, 예술을 위한 여백 한 스푼

딸은 거울 앞에서 자기를 만들어가고,

나는 그림 앞에서 나를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덧댄 건,

머리카락이 아니라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여백 위에 나를 천천히 다시 그려보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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