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세계의 온도
그 말을 나에게 들려준 건지, 어머니 혼자의 넋두리였는지는 모르겠다. 어릴 적, 나의 어머니는 빨래를 개다가, 나물을 다듬다 한 번씩 내뱉는 이야기가 있었다.
"죽을 만큼 맞았어. 그때 말야. 너네 할머니가 엄마 잠시 고아원에 맡겼거든. 배가 너무 고픈 거야. 그래서 몰래 부엌에 들어가 밥 훔쳐 먹다 정말 딱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
나는 대꾸할 수 없었다. 어린 내가 듣기엔 너무 폭력적인 이야기였고,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조차 몰랐다. 그날 이후로 '고아원'은 내게 빚진 단어가 되었다.
대학 시절, 휴학을 하고 재활원에서 보육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스무 살을 넘긴 나는 열한 명의 아이들로부터 '엄마'라 불리며 일 년을 보냈다. 오랜 시간이 타국에서의 삶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지금, 어머니의 '고아원'이라는 단어가 또다시 마음속에 맴돌았다.
작년에 문을 열어 아직 불안정한 화실 일을 뒤로하고, 나도 모를 이끌림에 보육원을 찾았다. 몇 달 전 인연이 닿은 보육원은 시대가 바뀐 만큼 어머니가 말하던 그런 고아원과는 확연히 달랐다. 보육교사들의 세심한 돌봄과 다양한 교육 지원이 있었고 아이들이 모습 또한 밝고 맑았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아이들은 늘 부모와 함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국 아이들의 행복지수가 높아지는 오월, 가정의 달. 나는 아이들과 미술 수업을 하러 보육원을 찾았다. 아이들은 자신만의 가방을 꾸미고, 자신을 돌봐준 고마운 사람들에게 줄 상장을 만들었다. 상장 속 이름에는 보육교사, 봉사자의 이름이 적혔다.
한 아이는 '일곱 살 때부터 나를 예뻐해 주고 돌봐준 ㅇㅇㅇ 선생님 사랑해요'라고 적었다. 나는 그 문구를 읽으며, 이 아이가 일곱 살에 이곳에 왔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했다. 아이들이 상장에 적은 글귀를 읽으며 울컥했고, 눈물을 삼키며 수업을 이어갔다.
같은 날, 나는 화실 홍보를 위해 어린이날 체험 수업을 진행했다. 아이와 함께 온 양육자들은 낯선 공간에서 아이가 당황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보듬었다. 수업 후에는 아이의 태도, 관심사, 성향까지 꼼꼼히 나눴다. 그런 양육자들의 관심에 오히려 투정을 부리는 아이들을 사랑스런 눈으로 다독이는 모습을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오전엔 보호자 없는 아이들과, 오후엔 보호자가 넘치는 아이들과 만났다. 그 차이는 잔인했다
선택해서 사는 삶이 아니다. 태어나 보니 이런 집, 살아보니 이런 삶이다. 누구 탓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더 잔인하다. 특히 아이들에게는.
가정의 달, 나의 어머니로 시작된 이 세상 속 아이들.
아이들의 삶은 공평할 수 없다.
그래도 오늘 하루만큼은 따뜻해야 한다.
앞으로 ‘수미아트’ 매거진에서는 아이들과 그림,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천천히 기록해 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