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 보육원을 찾는다. 다른 곳에서는 대체로 환영받는 미술 시간이 이곳에서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눈치였다. 아이들의 집중을 붙잡는 가장 쉬운 방법은 간식을 미끼로 삼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 갈 수 있는 방식은 아니었다.
보육원의 강당은 물감이 튀고 흘러도 되는 공간이 아니다. 물통에 붓을 담궈 휘적거리고, 광택나는 아크릴 물감을 캔버스에 척 올려 신나게 그려보는 작업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어지러짐을 최소화할 수 있는 재료 즉 색연필, 마커, 반제품 사용으로 대부분의 수업을 이어왔다. 이러한 재료사용의 제한을 능력으로 메우는 것이 강사의 몫이라 생각해왔지만, 이곳에서 내 발목을 잡은 건 또 하나, 바로 스마트폰이었다.
이제 스마트폰이 없는 아이를 찾는 일이 더 어려운 시대다. 보육원도 예외가 아니다. 주말 오전, 아이들은 짧게 허락된 그 시간을 온전히 누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 소중한 시간에 불쑥 끼어든 사람일 뿐이었다. 좋은 의도로 준비한 수업이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주중 학교생활을 버틴 뒤 비로소 접속할 수 있는 세계를 방해하는 시간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보육사들은 아이들의 스마트폰 사용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내 수업 참여를 권하지만, 미술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몇몇을 제외하면 “왜 해야 하냐”, “선생님 때문에 스마트폰 시간을 놓친다”는 한탄이 들려왔다. 아이들은 미술이 싫은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을 빼앗긴 상황 자체가 싫었던 것이지만 그 이유를 알기 전까지 수업을 등한시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내 수업에 대한 평이라고 생각했하며, 더 재미있게 만들어야 하나, 더 많은 간식을 준비해야 하나라는 고민만을 반복했다.
문제는 내 능력의 부족이라기보다, 아이들이 처한 구조적 현실이 더 컸다.
보육원 선생님들과 상의해 수업은 한 시간으로 줄였다. 미술이 어려운 공간적 한계도 있었고, 마침 내가 영어그림책 수업 경험이 있어 자연스레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첫 영어그림책 수업 날, 미술을 기대한 몇몇은 아쉬움을 보였지만, 게임을 곁들인 짧은 수업은 금세 분위기를 바꾸었다. 그림책을 읽고 노래를 틀고, 간단한 연계 미술도 더했다.
아이들이 만든 작품은 대부분 완성도가 높지않다. 보육원이라는 생활 공간의 특성상 작품을 방에 전시하기도 어렵기에 내게 건네고 가는 아이들도 있다. 미술의 자리는 이런 이유들로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스마트폰의 높은 재미, 물리적 공간의 제약, 작품을 소지하기 어려운 생활 구조.
예술이 실용보다 먼저 밀려나는 풍경을 여기서도 확인하게 된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12월, 아이들이 만든 작은 클레이 쿠키 조각들을 종이 접시에 담아 트리 아래에 두었다. 아이들이 돌아간 빈 교실에 남은 그 작은 모양들이 그 어떤 크리스마스 오너먼트보다 빛난다.
앞으로의 시간이 얼마나 바빠질지, 기술이 아이들의 하루를 얼마나 더 차지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아이들이 언젠가 자기 안에 남아 있는 감정의 결을 알아차릴 여유를 갖길 바랄 뿐이다.
예술이 그 여유의 작은 출발점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