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물조물,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시간

by 수미

미술치료를 공부하던 시절, 점토는 감정을 다루는 과정에서 가장 자주 권하는 매체였다. 점토는 처음에는 다소 강한 점도를 지니지만, 손의 압력을 받으면 형태가 즉각 바뀐다. 굴리고, 누르고, 바닥에 가볍게 내리쳐 반죽하는 일련의 동작은 신체감각을 자극하기도 한다. 감정이 과하게 고조될 때, 이 촉각적 자극은 긴장을 낮추고 불난 마음을 다시 현재로 불러오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미술치료 이론에서는 이를 ‘감각·운동 기반의 정서조절 기법’이라고 설명한다. 몸을 움직이며 재료를 다루는 행위가 심리적 환기를 돕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화실 한편에는 늘 점토 한 묶음이 자리한다. 표면을 밀거나 긁어낼 수 있는 아이들이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헤라들도 함께 둔다. 수채화나 드로잉, 아크릴화 중심의 평면 작업을 주로 하는 화실이다 보니 이런 정적인 활동에 가끔은 아이들이 지루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럴 때 나는 슬쩍 점토를 권한다. 아이들은 점토 한 조각을 뚝 떼어 주물거리며 촉각에 자극을 받는다. 좋아하는 캐릭터를 만들었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손안에 움켜쥐고 힘 있게 뭉개기도 한다. 이러한 변형 가능성이 아이들에게는 일종의 ‘해방감’을 제공하기도 한다. 마음이 복잡한 아이들일수록 점토를 더 많이 굴리고, 더 자주 다시 만들며 이러는 동안 아이들은 자기만의 속도로 감정을 조절해 나가기도 한다.


요즘 아이들에게 가장 큰 적은 의외로 영어 학원이다. 유치원까지 놀이식 영어로 깔깔대던 아이들이 초등 1학년에 들어서면 갑작스레 단어 암기에 내몰린다. 목표치를 채우지 못하면 남아 더 하고 가야 하는 학원도 있다. 가끔은 영어학원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화실로 가져오는 아이들도 있다. 화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이의 표정만 봐도 그날의 컨디션을 짐작할 수 있는 나. 아이들은 조금 전까지는 솜사탕 같은 천사였다가도, 감정을 받아줄 편한 어른이 등장하면 악동처럼 변하는 일도 잦다.


이럴 때 점토가 등장해야 한다. 책상 위에 점토를 펼쳐두고 “만들고 싶은 게 있다면 만들고, 아니라면 그냥 조물조물해도 좋아”라고 한다. 대부분은 한 덩어리 손에 쥔 채 조물거리다가 천천히 긴장이 풀림이 보인다. 어떤 아이들은 바닥에 툭 떨어뜨려보기도 하고, 손끝으로 꾹꾹 눌러보기도 한다. 아이들의 체온으로 더 말랑해진 점토는 그들의 분노와 불안을 부드럽게 흡수한다. 우연히 만든 모양이 예쁠 때는 환한 표정까지 지어 보인다.


가끔은 계획했던 수업을 하지 못하는 날도 있다. 하지만 내가 화실을 운영하며 세운 첫 번째 목표는 ‘작업을 통해 마음이 풀어지는 경험’이다. 감정이 가라앉은 아이를 본 수업으로 자연스럽게 이끌고, 끝날 때는 가벼운 표정으로 집에 돌아가게 하는 것. 그 과정이야말로 내가 가진 역량의 핵심이라 생각한다.


이런 점토의 마력은 어른들에게도 적용된다. 마음이 무거울 때, 작은 점토 한 조각을 집에 두었다가 손으로 천천히 주물러보는 일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효과적이다. 아니면 밀가루 반죽을 조물조물하다 들깨가루 가득 뿌린 고소한 수제비 한 그릇 끓여 먹는 것도 좋을듯하다.


손을 움직여 재료를 다루는 행위는 직접적인 설명 보다 먼저 마음을 풀어준다. 말랑한 재료가 감정을 유연하게 만들 때가 있다. 이러한 점토의 변화는 결국 우리 마음이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은근히 보여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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