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개의 감정
나는 지워지는 사람들을 만난다. 매일. 그리고 매년 같은 분들의 기억이 얼마나 지워지고 있는지, 혹은 작년과 비슷하게 잘 유지가 되어 있는지 기억을 평가하는 신경심리사이다. 우리의 인지능력이 사실 기억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 그 누구도 고치지 못한 알츠하이머로 인한 치매는, 기억의 저하부터 시작된다.
깜박 깜박
냄비를 태우고 열쇠를 잃어버리면서 건망증처럼 잊기 시작한 것이 어느 날은 약속을 잊고, 약을 챙겨 먹는 것을 잊고, 날짜 개념을 잊고, 이틀 전 누구를 만났는지 모르게 되고, 오늘 아침에 밥을 먹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하고 그러다가 결국엔 내가 살고 있는 주소를, 사랑하던 손주의, 자녀의 이름을, 얼굴을 잊고 결국엔 나의 이름마저, 현실의 감각마저 지워진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 라는 영화 제목, 참 잘 지었다고 생각했다. 지우개로 지우면 어떤 건 빨리 지워지고 어떤 건 조금 더디게 지워지고, 아주 꾹꾹 눌러쓴 글자들은 끝까지 지워지지 않으려 버티다가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니까.
하지만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흔적은 바로
감정
우리의 대뇌는 많은 것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크게 3가지로 나누면 아주 오래 전의 인간일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생명유지'를 담당하는 뇌줄기와 소뇌로 이루어진 후뇌. 그 위에 있는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가 있는 중뇌. 그리고 가장 최근에 진화한, 인간들이 지닌 고도의 복잡한 인지기능들의 집합체인 대뇌피질이 있는 전뇌로 나뉜다.
우리의 알츠하이머 지우개는 대뇌피질을(그 중 해마부터) 지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점점 침범한다. 같은 말을 반복하고, 들어도 금방 잊고, 아닌 사실을 맞다고 우기기 시작하기에 함께 있는 사람들은 때론 답답하고 화도 난다.
당신이 틀렸다고, 그게 아니라고 말해도 그 말은 허공에 흩어진다. 왜냐하면 우리의 판단에는 택도 없는 것들이 그들에게는 "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적을 받아도 '기억'은 사라지지만, '감정'은 남게 된다.아무리 기억이 없어도, 감정은 치매의 말기까지 남아 있다. 싫고 좋고 슬프고 주눅이 들고... 감정이 바로, 꾹꾹 눌러썼던 연필의 흔적 같은 거다. 결코 쉽게 지워지지 않는..
그래서 기억과 감정의 갭에, 보호자들은 힘이 든다. 보호자들은 엉뚱한 이야기를 할 때 주위를 잠시 다른 곳으로 돌려 잊게 하거나, '그러려니' 하는 식으로 대처한다.
체념
치매를 앓는 보호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들 중 하나이다. 결국은 받아들이고, 낫지 않는 병이라 체념하고... 좋은 효과를 보이는 약도 쉽사리 나오지 않는, 이 알츠하이머 지우개는 끊임없이 지워나간다. 그래도, 기억은 사라져도 감정은 남는다.
행복했던 추억과 사랑했던 감정, 그 감정들이야말로 깊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