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 갔다. 내 앞에서 할머니 한 분이 방황하고 있었다. 어디가 열린 문이고 어디가 닫힌 문인지를 몰라 헤매셔서 안내해 드렸다. 나는 할머니의 옆 칸에 앉았다. 이윽고 할머니의 혼잣말 아닌듯 혼잣말인, 어쩌면 도움을 요청하는 혼잣말처럼 "아이구 이거 물을 어떻게 내려 아이구"하고 말하셨다.
눈을 돌려 변기 뒤를 보니 나에게는 익숙한 버튼이 있었다.
물내림 大 / 물내림 小
그 아래엔 영문 push the button
젊은 나의 경우 그냥 눈을 돌려 보기만 하면 알 수 있는 것을 할머니는 모르신다. 할머니의 시력이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봤지만, 그러기엔 적혀 있는 글자의 크기는 상당히 크다. 어쩌면, 할머니가 글을 모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어로도 적혀 있고, 한자로도 적혀 있지만 정작 비문해자를 위해 그림으로는 표시되어 있지 않는 '물내림'
세상의 모든 것들이 약자의 시선에서 만들어 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부분 글과 그림, 말로 구성되어 있는 신경심리평가를 시행하다 보면 글을 모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생각보다 정말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일하는 지방 소도시의 경우 특히 더. 문맹의 경우 할머니들의 비중이 높다. 이유는 다들 짐작하시리라.
그 옛날,
여자가 배워서 어디다 쓰느냐
여자는 학교갈 필요가 없다
많은 할머니들이 그 이야기를 들어왔고, 학교에 가지 못하게 몽둥이로 맞기도 했고, 공장에 들어가 번 돈을 남동생의 학비로 부쳐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을 겪어온 세대. 여자라는 이유로 '포기'가 당연시되던 세대.
학력을 물어보면 할머니들은 글을 모른다고 부끄러워하면서도, 분통을 터트린다. "이런 것 해 본 적이 없다"고 연필을 쥐고 울기도 한다. 빼앗긴 교육의 기회에 대한 원망이리라. 뒤늦게나마 한글 교실 같은 곳에 출석하여 글을 배우는 할머니들도 있지만 이미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났다고, 배워서 무엇하냐고, 삶을 치열하게 사느라 '배움'을 포기해버린 분들도 많다. 보통은 교육을 많이 받을수록 신경심리검사의 수행도 좋은 편이다. 그러나 때론 그렇지 않은 순간도 존재한다. 학력에 비해 정말 우수한 수행을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계신다.
그림을 그리고 외우고, 생각하고, 무언가 '공부'같은 느낌이 들어 대부분은 이 검사를 힘들어 하지만 가끔 즐겁게 수행하는 분들이 있다. 마치 목마른 사슴이 꿀꺽꿀꺽 물을 마시는 것마냥, 목말랐던 공부를 하는 것마냥. 그럴 때면 이런 생각을 한다. 이 분들이 정규 교육을 대학교까지, 아니 고등학교까지만 배웠어도 직업과 월급이, 삶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함부로 내가 재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의 총명함이라면 배움과 공부에 대한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대학 교수도 했을지 모른다고.
다만 그렇게 되지 못했던 이유가 가난했기에, 여자였기에 그 기회가 성별이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을 때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고슴도치의 우아함>이라는 책에는 파리의 아파트에 사는 수위 르네가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식해 보이지만 사실은 문학적, 예술적인 소양이 있는 사람이다. '수위 아주머니'이라고 고착화된 이미지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지적인 사람인 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문맹 노인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외국에서 들어온 치매검사는 기본적으로 언어능력을 토대로 실시하기 때문에 문맹 노인들은 인지기능평가의 점수가 전반적으로 낮게 나온다. (물론 표준화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무학의 경우 문맹과 글을 읽고 쓰는 사람, 읽지만 쓸 줄 모르는 사람 등 다양한 편차가 있는 편이다) 교육을 받은 사람에 비해 문맹자들은 치매로 갈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렇지만 내가 만났던 똑똑한 문맹 할머니들은 어쩌면 수위 아줌마 르네와 같았을지 모른다. 글 대신 말로 지식을 습득하고, 배움에 대한 열린 사고를 가지고 암산을 잘 해내고 말이다. 글을 배우지 못해 남들이 볼 땐 무식해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내면에 총명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시대만 잘 타고났다면 대학교수까지도 했을 사람들.
'무식'하다는 말, 지식이 없다는 말인데 사실 학력이 높다고, 교육을 많이 받았다고 해서 다 유식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교육을 받지 못했어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인생 속 모든 것들에 대해 '배움'의 자세로 임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어른이며 지식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