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말문이 느리게 터져 답답했던 시기가 있었다. 인터넷에 보니 엄마가 말을 많이 해주면 된다던데.. 난 그렇게 하고 있는데. 복직 전까진 TV를 거의 보여주지 않았는데. 정답이 정해져 있는데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디서 오답이 된 건지 몰랐던 때가 있었다. 나는 그게 아이의 언어였지만, 모든 엄마들이 죄책감을 안고 산다. 키가 작으면 작은 대로, 충치가 생기면 생기는 대로.. 이상하네 분명 단 것도 많이 안 먹고 뽀뽀도 많이 안 하고 열심히 양치질했던 우리 아기에게 언제 충치균이 들어간 걸까 하며 속상해한다.
엄마들이 하는 가장 큰 착각은 '내가 노력하면 노력하는 만큼 통제할 수 있다'라고 믿는 것이다. 아기는 완벽하게 먹 놀 잠 스케줄이 되고 내가 아이의 입에 뽀뽀를 하지 않으면 충치가 생기지 않고, 내가 책을 읽어주고 말을 많이 하면 말이 빨리 트이는 아기가 된다는 것 같은 착각.
돌이켜보면 충치고 언어고 간에 운빨이고 기질빨이고 유전자빨이고 거기에 양육빨이 섞여 있는 것이다. 하나의 문제에 대한 원인은 하나가 아니니까.
많은 육아서를 읽지만 결국 거기에 나오는 내용을 받아들이고 취합해서 나만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한 부분이다. 유용한 정보도 많지만 때로는 더욱 강박적인 엄마가 되게 하는 책들도 있다. '완벽'한 엄마들은 sns를 점령하고 있고 쇼츠에는 각종 자극적인 표현들('이건 절대 하지 마세요 ' 라거나..)이 불안을 키우곤 한다. 사실 육아는 공부가 아니고 성취도 아니고 자격시험도 아닌데 열심히 육아공부를 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육아서적을 전혀 읽지 않는다면?
삐뽀삐뽀 119에 나온 사례처럼 아기가 좋아한다고 요구르트를 하루에 11병씩 주는 양육자가 되거나 논문의 사례처럼 임신을 했는데도 매일 소주 1병씩 먹는 상식 밖의 사람들도 많다.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도 있다. 부모가 되기 위해 무언가 고찰하고 알아보고 자신을 돌아보았다면 이런 극단적인 행동들이 줄어들지 않았을까. 그러니 부모가 되기 위한 적당한 공부는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결국 그 극단의 사이에서 적절함을 찾는 일. 중용의 길을 걷는 것
일관성과 융통성, 강박과 자유 사이에서 중간의 길을 걷는 것. 때론 지나친 일관성이 숨 막히고 때론 이렇게 왔다 갔다 하면 아이가 혼란을 느끼진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긴 하지만 말이다. 그 외에도 많다. 소황제와 주눅든 아이 사이에서의 중도의 길을 걷는 것. 응석받이가 되게 할 것인가 상처받은 애늙은이가 되게 할 것인가에서 평균지점을 찾는 것 등등..
사실 나를 비롯한 엄마들이 걱정하는 것들이 때론 부모의 탓이 아닌 경우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의 경우, 시댁과 합가를 하고 난 이후부터 TV를 많이 보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중독성향을 보이지 않는다. TV를 끄자고 하면 스스로 끄고 한두 편 더 본다고 약속하면 약속을 지킨다. 우리 가족은 뭘 딱 일관성 있게 지키지는 못했다. 어쩌면 아기는 중독에 취약하지 않은 유전자를 가진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물론 만능유전자설은 좋지 않다)
그러니 더더욱 어려운 육아. 내가 맞다고 생각한 지점을 다른 부모는 불편해하고,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포인트가 때로는 주류의 의견이기도 하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게 잘하고 있는 건가?라는 마음이 매일 든다. 육아는 잘하고 못하고의 의미는 아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육아와 걱정거리에 대해 할머니의 의견을 듣고 남편의 의견을 듣는다. 맞지 않는 지점도 분명 있지만 오히려 그래서 다른 관점으로 생각할 수 있다. 불안이라는 액셀을 밟지 않고 '중용'을 실천할 수 있게 적절한 점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사실은 어떤 육아용품을 사줄지 어떤 장난감을 사줄지 이런 것들보다는 저런 의문과 질문들이 육아의 본질이다. 결국은 또다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나부터 솔선수범을 하자는 마음가짐으로, 그리고 삶을 대하는, 타인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성찰해 본다.
너무 무디지도, 너무 예민하지도 않게
너무 휩쓸리지도, 너무 독선적이지도 않게
결국 부모로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는 수련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게 육아의 의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