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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eath in Jun 06. 2018

유월

절반을 딛고

여름이 '나 여기 왔소' 하고 온 세상을 향해 존재감을 과시하는 나날이다. 벌써부터 열대야라면 남은 이 계절과 어떻게 지내야 할지 아찔해진다. 에어컨을 개시했다. 달아오른 노트북을 끌어안고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에어컨에서는 지난여름에 저장된 찬바람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전에 이 집에 살던 사람과 교감하는 기분이 들었다. 흰 바탕 위에 커서가 깜빡이면 별의별 생각이 정작 해야 할 생각을 방해하는 오래된 병이다.


요즘 들어 부쩍 뜨거운 노트북과 씨름하고 있다. 작년 유월 떠나갔던 여행의 기억을 뒤늦게 복원하기 위함이다. 아무리 게으름을 피워도 일 년이면 해치울 수 있을 만한 분량이라고 여겼다. 나는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주 그랬듯 내 생각이 또 틀렸다. 보름 뒤면 여행을 떠난 지가 벌써 일 년이 되는데, 여태 반절을 채 쓰지 못했다. 


지나간 시간 속으로 파고들다 보면 마음 한 구석에 소르르 슬픔이 일어난다. 그때 그곳과 그 사람들, 무엇보다 그 속의 나 자신이 아득하고 애틋해서다. 영원하지 않을 것을, 어쩌면 다시없을 것을 알면서도 스쳐가고 말았던 모든 게 아쉬움으로 다가와서다. 여행기를 쓰기 위해 과거를 더듬으며, 지금 이 순간의 작은 모든 것에 정성을 다해야겠다고 수시로 마음을 먹는다.


한남, 서울


결심처럼 사는 게 쉽지 않다. 여행기에 마음을 빚지고 있으니 다른 걸 쓸 수가 없다. 블로그도 놔 버린 지 오래다. 글다운 글을 쓴 게 아니고 밑줄 친 문장과 명대사들을 옮겨 적거나, 이따금씩 하는 잡생각을 부담 없이 적어두던 창고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오랜만에 들어가 보니까 '여행기를 위해 브런치로 당분간 이사하겠다'라고 적어둔 게 보였다. 이도 저도 못한 나 스스로가 부끄러워 피식 웃음이 났다. 


그동안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올해는 매일 짧게 메모로라도 일기를 쓰자고 한 것을 (비록 도합 한 달은 빼먹었지만) 꾸역꾸역 지키고 있다. 그때그때의 시선을 실어두겠다면서 시작했던 인스타그램에는 온갖 기록들을 많이 흩뿌려놓았다. 하나같이 누굴 위한 것인지 꽤나 헷갈리는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거기엔 오늘을 붙잡겠다는 사투 같은 게 조금은 배어있다.


유월, 벌써 유월이다. 유월을 참 좋아한다. 육월이 아니라 유월이라는 소리가 나서 더 좋다. 한 해의 절반이 뚝딱 지나갔구나 실감하는 그 달에, 벽 하나를 넘어가는 듯한 장난스러운 상상을 할 수 있으니까. 올해도 벽 하나를 넘어가 보기로 한다. 남은 올해는 조금 더 쓰면서 지내고 싶다. 글도 마음도. 게으른 자에게 주어진 형벌 같은 여행기도, 대체로 부끄러울 혼잣말도 차근차근 자주, 많이 써내려가겠다. 그래서 또 하나의 창구를 파두어 본다. 


여행기는 오늘 영 안 써지니까 내일부터 진짜 열심히 써야지. 진짜.


광화문,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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