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토: 잉카의 고도, 오래된 골목

지나쳐버릴 뻔했지 뭐야

by breath in

20170629~20170630, Quito, Ecuador


하마터면 키토를 건너뛸 뻔했다. 두 달 안에 파타고니아까지 욱여넣는 게 벅차 키토는 환승지로만 여겼다. 치안이 안 좋다는 친구들의 말도 자꾸 귓가에 맴돌았었다. 그러다가 갈라파고스에서 계획을 바꾸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는 룸메이트의 말을 듣고 마음을 바꿨다. 언제 다시 밟을지 모르는 남미 땅, 지나치는 모든 곳을 조금이라도 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라파고스 제도 일정이 끝나기 직전 현지에서 비행기 티켓을 바꿨다. 대단한 변경은 아니었고 고작 반나절을 둘러봤을 뿐이지만, 잘 한 일이었다. 키토의 골목들은 남미에서 가장 독특하고 운치 있는 골목으로 내 기억에 남았다.


키토 구시가지의 골목길. 좁은 길인데 차량 통행이 꽤 많다. 20170630, 키토, 에콰도르


야경과 라면


에콰도르의 수도인 키토. 이 도시에 도착한 날 저녁, 하늘에 구멍이 난 듯 비가 내렸다. 픽업 서비스를 신청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주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시원찮은 자동차를 몰고 온 기사 아저씨는 장대비 속에서 한 손으론 운전을 하랴 다른 손으론 와이퍼 대신 앞유리를 닦으랴 지나치게 분주했다. 무언가에 집중할 틈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빗줄기는 거세져 창 밖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의 손놀림은 바빠졌고, 클랙슨은 걸핏하면 울려댔다. 나는 마음속으로 주기도문을 외웠다. 슬며시 안전벨트도 맸다. 그게 키토의 첫인상이다.


내가 하룻밤을 묵어가는 까사 까르페디엠은 구시가지 한가운데에 있었다. 건물의 외양만큼이나 내부도 운치 있게 멋진 곳이었다. 짐을 풀고 나니 긴장도 함께 풀리면서 소소로 한기가 돋았다. 저녁을 먹으러 나가기엔 아직 빗줄기가 거셌다. 해가 진 뒤의 키토 시내를 혼자 돌아다닐 생각은 하지 말라던 친구의 경고도 귓가에 메아리쳤다.



고민 끝에 비상식량으로 가져온 처음이자 마지막 신라면 하나를 집어 들고 공용 식당으로 나갔다. 방문을 닫고 돌아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한참을 거기 서 있었던 것 같다. 비에 젖은 창 밖으로 수놓아진 압도적인 야경 때문이었다. 키토는 해발 2850m 고도에 지어진 도시였다. 그 높은 도시의 밤을 불빛 위의 불빛이, 또 그 위로 다시 빼곡히 들어찬 불빛이 밝히고 있었다. 불 켜진 창만큼의 삶이 거기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아득했다.


비 오는 고도(古都)의 밤하늘을 이따금씩 훔쳐보면서, 하나뿐인 신라면을 조리했다. 높은 곳이라 물이 쉽게 끓지 않았다. 간신히 라면을 끓는 물에 넣고 스프를 열었을 땐, 오래간만에 맡는 매운 냄새에 연신 재채기가 나왔다. 토마토를 썰던 폴란드 커플이 "정말 매울 것 같아!"라면서 키득거렸다. 신라면에선 예외 없이 황홀한 맛이 났다. 야경을 바라보면서, 한 방울의 국물도 남김없이 들이켰다. 너무 빨리 비장의 무기를 소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시 서글퍼질 지경이었다.


언제나 인 골목


적도 바로 아래의 땅, 잉카 제국의 흔적 위에 세워진 이 오래된 도시의 아침은 뜨겁고도 선선했다. 상춘(常春)의 기운이 이런 것이구나 싶은 쾌적함이었다. 키토는 1797년과 1859년 두 번의 큰 지진을 겪고도 남미에서 가장 잘 보존된 도시로 손꼽힌다고 했다. 그 역사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1979년 유네스코 세계 10대 문화유산도시로 지정됐다.


다수의 여행자들이 키토 근교의 적도박물관을 찾는다지만 반나절뿐인 시간을 급하게 근교를 오가는 데 쓰고 싶지 않았다. 대신 이 도시를 한가롭게 구경하기로 하고, 독립광장을 시작으로 산토 도밍고 수도원, 라 콤파냐 성당을 거쳐 구시가지 곳곳을 내내 걸어 다녔다. 오르막을 걷는 건 퍽 힘이 들었다. 온몸으로 고도를 체감하는 기분이었다. 어딘가 멍하기도 하고, 조금만 잰걸음을 해도 숨이 차올랐다. 앞으로의 여정에 남아있는 까마득한 고도를 견디려면 연습을 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그래서 고행하듯, 진득이 걸었다. 갈라파고스에서는 휴양을 했다면, 이제는 진정한 여행이 시작된 셈이었다.


가파른 오르막길 사이 골목마다 나지막한 건물들이 즐비했다. 시야에 들어오는 건물 하나하나가 알록달록 고스란히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곁을 따라 걷다 보니 먼 옛날의 어느 스페인 거리를 거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조금만 눈을 들면 안데스 산맥의 자락이 초록 장막처럼 도시를 받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위의 말간 하늘과 뭉게구름은 그림 같았다. 걸어도 걸어도 지겹지 않은, 멋들어진 풍경이었다.


산 프란치스코 수도원 앞의 노인. 걸인이라기에는 입성이 썩 나쁘지 않았고, 취객이라기엔 취한 것 같지 않았다. 인상에 깊이 남는 장면이었다. 20170630, 키토, 에콰도르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산 프란치스코 수도원이었다. 이 랜드마크 앞은 하필 공사가 한창이었다. 정면에 서서 사진을 한 장 찍고 싶었는데 도무지 각이 나오지 않았다. 공사로 가뜩이나 어수선한 수도원 앞에는 한 노인이 모로 누워있었다. 그는 오가는 관광객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계단에 기대 오수를 즐기는 중이었다. 행색은 조금 남루했으나 평안한 표정이었다. 그의 얼굴 위로도 다른 모두에게처럼 태양이 쏟아지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지만 그에게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평화롭고 쓸쓸한 장면이라 눈길을 떼기가 힘이 들었다. 키토의 끝인상이었다.


키토의 여느 거리 모습. 전날의 폭우 덕인지 유독 하늘이 청명해서 어디를 찍어도 아름다웠다. 20170630, 키토, 에콰도르
#소소한 여행 팁

1. 키토 공항에서 도심 간 이동은 우천 시가 아니라도 교통량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고 한다. 넉넉히 시간을 잡고 이동하는 게 좋겠다.

2. 고도가 지극히 높은 곳이라고 할 순 없지만 불편함이 느껴진다면 아주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물을 많이 마시는 게 좋다. 타이레놀도 도움이 된다.

3. 반나절 걸어 다닌 게 전부라, 딱히 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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