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과 섬 사이
푸노는 바다만큼이나 끝없이 펼쳐진 티티카카 호수의 도시다. 보통은 티티카카 호수의 맞은편 그러니까 볼리비아 쪽 도시인 코파카바나를 더 많이 찾는다. 거기서 태양의 섬 투어를 하는 게 가장 인기가 많은 듯했다. 푸노는 E언니와 나의 잘못된 일정 계산을 바로잡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푸노에 가기 위해 처음으로 야간 버스를 탔다. 그나마 시설과 서비스가 웬만한 비행기 급이라는 크루즈 델 수르. 하루 종일 마추픽추에 다녀오느라 쌓인 여독 때문에 야간 버스의 시설을 만끽하거나 가져온 영화를 볼 틈, 일기를 쓸 여유도 없이 시체처럼 잠이 들었다.
잠깐 눈을 감은 것 같은데 눈을 뜨니 벌써 푸노였다. 아직은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 공기가 찼다. 체크인 시간까지 호텔 로비에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비몽사몽간에 아침을 먹고 샤워를 한 뒤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진정한 '난방'의 의미를 모르는 남미 사람들 탓에 고산지대 모든 도시의 방들이 얼음장처럼 찼다. 언제나 습관처럼 침대 위에 침낭을 두고 그 안에 들어가 이불과 오리털 파카를 모두 덮은 채 잠을 잤다. 푸노에서도 그랬다. 한참 자다가 뭐라도 먹어야 살겠다 싶어 일어난 게 오후 2~3시쯤이었나 보다.
감기가 절정에 달해 있었기 때문에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잉카 약국에서 척 보기에도 독해 보이는 감기약을 여러 종류 사다가 먹었는데도 별 차도가 없었다. 뒤늦게 약초로 만든 것 같은(정확하게 어린이 한방소화제 '백초' 맛이 났다) 물약을 샀는데 그나마 그게 조금 듣는 듯했다. 나 때문에 E언니까지 감기에 걸려 골골거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둘 다 평소 같으면 드러누워 꼼짝 안 했을 컨디션이었지만, 애꿎은 시간을 방구석에서 보낼 순 없어서 꾸역꾸역 밖으로 나갔다.
조금은 남루해 보이는 골목을 따라 5분쯤 걷자 광장이 나왔다. 광장이 있는 중심가는 관광지 같기도 하고 여느 시골의 읍내 같기도 한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한동안 머물렀던 쿠스코는 너무나 관광지 같은 곳이었는데 상대적으로 푸노에선 현지인들의 일상을 느낄 수 있었다.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는 학생들, 광장을 지키는 경찰들, 길거리 음식을 파는 노점상들, 나름의 대형 마트, 거리 한가운데 놓인 대형 미끄럼틀에서 교복을 입고 미끄럼틀을 타는 아이들, 해질녘 티티카카 호숫가를 거니는 젊은 연인들. 오랜만에 만나는 듯한 남들의 '일상'이 묘하게 편안한 기분을 불러다 주었다.
걷고 또 걸었다. 온통 흙빛인 거리가 끝나는 곳에서 마침내 새파랗게 반짝이는 티티카카 호수의 물결을 만날 수 있었다. 하늘 위에서 본다면 사막 속의 오아시스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도시의 흙빛과 대조되는 선명한 파랑이 거기 있었다. 귀여운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해발고도 3820m, 우뚝 솟은 알티플라노 고원지대 위에 펼쳐진 남미 최대의 담수호 티티카카. 평균 수심은 200m 이상이며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의 발상지로 꼽힌다고 했다. 선착장에서 내다보기엔 끝없이 광활한 바다처럼 보일 뿐 규모가 실감되지 않았다.
이튿날 우로스 섬과 타낄레섬을 함께 둘러보는 일일투어에 나섰다. 배를 타고 잔잔한 호수 한가운데로 한참을 나아갔다. 사방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푸른 수평선뿐이었다. 우로스 섬은 갈대와 유사한 식물인 '토토라'를 엮어 만든 인공섬이다. 말 그대로 티티카카 호수 한가운데에 둥둥 떠 있어서 '이슬라스 플로탄테스(Islas Flotantes)', 즉 떠 있는 섬이라고도 불린다. 먼 옛날 우로스 부족의 사람들의 육지의 분쟁을 피해 호수로 들어가 섬을 만들고 살아온 게 우로스 섬의 뿌리다. 지금은 수십여 개의 섬이 그렇게 호수 위에 떠있다.
유독 맑은 하늘과 호수의 청량한 파랑 사이로 노란 갈대섬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섬마다 알록달록한 전통 복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물가로 나와서 지나가는 배들을 향해 힘껏 손을 흔들었다. 우로스 섬이 지나치게 상업화됐다는 얘기는 하도 들어서 각오를 했지만, 배에서 내리가 전부터 그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주민들이 섬과 집을 만드는 모습을 시연해줬다. 토토라를 잘라 묶어서 두꺼운 뗏목처럼 만든 뒤에 말린 토토라를 다시 두껍게 얹으면 섬이 된다. 토토라 뿌리 속에 든 공기 덕분에 물 위에 둥둥 뜬단다. 1년쯤 지나면 다시 다음 섬을 지어 옮긴다고 했다. 주민들은 토토라는 우로스 사람들의 터전이자 식재료라고 설명하면서 자신들이 아직도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정색을 하고 주장했지만 그들이 아침저녁으로 푸노 시내에서부터 출퇴근을 한다는 얘기를 익히 들은지라 믿기지가 않았다.
물건 강매가 이어진 뒤에는 전통배를 타고 섬을 한 바퀴 돌았다. 배 위에서는 5~7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노래를 했는데 노래가 끝나자마자 손을 내밀어 돈을 달라고 했다. E언니와 동전 몇 푼을 모아 함께 줬더니 더 달라고 옷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앵벌이처럼 느껴지면서도, 이렇라도 주민들이 돈을 벌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 구경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여러모로 마음이 복잡해졌다.
우로스 섬에서 배를 타고 2시간 30분을 달려야 타킬레섬이 나온다. 중간에 한참 잤는데도 풍경이 그저 같기만 해서 시간이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오후가 될수록 태양은 더욱 강렬해져서, 이 강한 햇빛 아래 호수가 말라버리지 않은 것이 신기하게 여겨질 지경이 되었다. 뜨거운 햇빛을 등에 업고 산꼭대기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광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죽을 고비를 넘겨서 도착한 광장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찬란한 파란색에 눈이 아려왔다. 하늘과 물의 경계가 구름이 아니었다면 가려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온통 파란색이었다. 계단식 논밭과 사이에는 작은 성냥갑처럼 집들이 박혀있었다. 조금 더 조용하고 한적한 남해 다랭이마을을 보는 것 같았다. 제주도보다도 작은 이 섬의 마을들은 잉카 시절처럼 공동생산, 공동분배 방식으로 살아나간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에는 교도소로 쓰였다던데, 교도소로 쓰이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 거대한 호수 한가운데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이게 바다가 아니라 호수라는 걸, 이 바깥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알기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들만의 삶을 살아왔을지를 하릴없이 생각해보았다. 바깥세상과 연결된 뒤에는 과연 더 행복했을까, 한없이 고요하고 평온한 이곳에서의 지금 삶은 어떨까, 여기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은 나보다 행복한 유년을 보내고 있을까. 멍하니 잡생각을 할 때 고산 증세가 도움이 된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소소한 여행 팁
1. 푸노의 선착장에서 이튿날 출발하는 하루짜리 투어 상품을 예약할 수 있다. 숙소마다 연계된 상품이 있으니 묵는 곳에서 알아보면 조금 더 합리적인 가격에 예약할 수 있다.
2. 무엇을 기대하든 우로스 섬에서는 그 이상의 상업화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3. 물가라서 자꾸 고도를 잊는데 몸에 무리가 갈 수 있으니 언제나 물을 많이 챙겨가지고 다니자. 특히 타낄레섬에서 천국 가는 줄 알았다.
4. 타낄레섬에서 식사를 한다면 반드시 송어 튀김 요리인 '트루차'를 먹자. 티티카카 호수의 명물이다. 사람들이 한참 송어를 설명했는데 스페인어 몰라서 그거 못 시키고 오믈렛 시킨 뒤 후회했다. 여행 책자라도 좀 보고 갔으면 알아챘을 텐데 감기 앓느라 제대로 못 봤다.
5. 타낄레섬에서는 위로 갈수록 물이 정말 비싸다. 푸노 시내에서 큰 물병을 사 가지고 투어에 나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