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스: 발 밑의 별

반나절의 기억

by breath in

20170708~20170709: La Paz, Bolivia


다시 혼자 떠날 시간이 찾아왔다. E언니와는 푸노에서 헤어졌다. 계절이 바뀔 때의 서울에서 다시 만나는 날까지 서로의 여정에 안녕을 기원해주면서, 언니는 다시 쿠스코로 나는 볼리비아로 떠났다. 티티카카 호수의 반대편 도시인 코파카바나(Copacabana)를 거쳐 수도 라파스까지 온종일 이동을 해야 하는 데다가, 남미 여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육로로 국경을 넘어야 하기에 조금 긴장을 했다.


코파카바나의 호숫가. 코파카바나, 볼리비아, 20170708

국경의 저편


사는 동안 내게 국경은 자주 허공에만 있었다. 반으로 쪼개진 반도의 남쪽 편은 섬 아닌 섬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비행기를 타고 영공을 넘나들어, 공항 입국 심사대를 지나는 과정에서 느끼는 것으로는 어쩐지 시원찮았다. 유럽 여행을 할 때에 차로, 기차로 어떤 표지판들을 넘어 다니면서는 '국경'이란 것이 책 밖에도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EU와 솅겐 조약으로 묶인 경계들은 국경답지 않게 호락호락했다.


남미 대륙에서 내 두 발로 건너간 첫 번째 국경은 페루와 볼리비아의 국경이었다.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출발해 3~4시간 만에 국경에 다다랐다. 국경 치고는 꽤 허술해 보이는 곳이었다. 걸어서 조금 이동해 시골 슈퍼마켓 같은 검문소에서 페루 출국 도장과 볼리비아 입국 도장을 받았다. 국경을 지키는 사람들이 여유롭고 헐렁해 보여서 아침부터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졌다.


터미널에서 애매한 시간을 때우는 동안 엔빠냐다를 먹었다. 너무 맛있어서 토마토 치즈 바질 맛을 먹고 칠리 맛을 홀린 듯 또 샀다. 코파카바나, 볼리비아, 20180708

다시 버스에 올라 30분 정도를 달렸더니 코파카바나 시내가 나왔다. 푸노보다는 훨씬 휴양지 느낌이 물씬 나는 동네였다. 터미널 주변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코파카바나에서 라파스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 버스에서 우유니를 함께 여행할 일행들을 만났다. 쿠스코에서 보고 못 본 지 사나흘 정도가 흘렀을 뿐인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라파스까지 가는 먼 길이 한결 편안할 것 같아서 기뻤다.


라파스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이긴 한데 중간에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호수를 한번 건넜다. 버스가 먼저 배를 타고 건너가면 사람끼리 모여 배를 타고 쫓아가는 식이다. 그 배라는 것도 흔히들 차를 실어 나르는 화물선이 아니었다. 나룻배 같은 것에 버스가 한 대씩 타서 물 위를 둥둥 떠갔다. 생경한 광경이었다. 버스가 유유히 멀어지는 걸 보면서 우리는 더 작은 통통배로 뒤따라갔다. 국경을 넘을 때보다 20분 배를 타고 물을 지나갈 때 더 엄중한 무언가를 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탔던 버스가 배에 타는 중이다. 코파카바나, 볼리비아, 20170708


높이 걸린


버스가 온종일 달리는 동안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이따금씩 눈을 뜰 때면 부서지다 만듯한 건물과 거리가 차창 밖을 스치고 지나갔다. 비포장도로 위의 흙먼지와 다 무너져가는 폐가들이 어우러져 띠는 쾌쾌한 빛깔. 가난이 온통 흙빛으로 들끓었다. 색은 길을 가는 여인들의 치마나 스웨터 위에만 있는 것 같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정비되지 않은, 어설픈 도시들 사이를 버스는 한참 내달렸다.


라파스 시내로 접어드는 건 경적 소리로 알았다. 고도 3800m. 이 도시가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수도라고 했다. 도시가 융단처럼 온 산을 뒤덮고 있어서 어딘가 기이해 보였다. 도시가 시작되는 산의 맨 끝, 까마득한 꼭대기에서부터 아래로 아래로 도시의 심장부를 향해 버스는 한참을 내려갔다. 좁은 골목을 따라 내려가는 길이 내내 많이 막혔다.


차를 타고 허겁지겁 공항으로 달려올라가는 길에 내려다보이는 라파스를 찍어보았다. 라파스, 볼리비아, 20180709

버스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거의 다 넘어간 뒤였다. 라파스는 일정에 쫓기는 내게 경유지에 불과했다. 다음날 아침이면 비행기를 타고 우유니로 날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원래 공항 캡슐호텔에서 자려고 했는데 민박집 밥이 하도 맛있다기에, 또 우유니 일행들이 모두 머무른다기에 적지 않은 돈을 내고 민박집에 머물기로 했다.


버스터미널까지 민박 사장님이 픽업을 나오셨다. 1975년쯤 볼리비아에 터전을 잡으셨다는 사장님은 라파스에서 부촌은 맨 아래, 빈촌은 까마득한 위에 위치한다고 이야기해주셨다. 이 도시를 비롯해 높이 위치한 모든 도시에서는 누구나 100m라도 더 낮은 곳에 살기를 갈망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다.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더 높이 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영 씁쓸한 모순이었다.


민박집 저녁 메뉴는 비빔밥이었다. 이성을 잃게 하는 맛이 났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 많이 먹어서 체했다. 라파스, 볼리비아, 20170708

민박집에 도착하니 또 다른 우유니 일행인 H언니 부부가 미리 도착해 쉬고 있었다. 저녁 메뉴는 비빔밥. 고소한 참기름 냄새에 홀려 밥을 마시다시피 먹었다. 맛있어서이기도 했고, 시간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고작 하루뿐인 라파스의 밤을 허투루 보낼 수 없어서 야경을 보러 가기로 했다. 체하도록 급하게 밥을 먹었는데도 민박집과의 거리와 시간이 맞지 않아서 야경을 보러 다들 간다는 낄리낄리 전망대에는 가지 못하게 됐다. 대신 텔레페리코를 타기로 했다.


텔레페리코는 관광용 케이블카가 아닌 일종의 전철 같은 교통수단이었다. 높이 사는 사람들의 발 같은 것이라 운영 시간도 정해져 있었다. 역에 내린 뒤 역사 안의 창가를 기웃거리다가 영 안될 것 같아서 역 아래 골목길로 조금씩 내려가보기 시작했다.


창의력이 고갈된 포즈. 라파스, 볼리비아, 20180708


한걸음 옮길 때마다 숨이 가빠지는 골목 사이사이로 누군가의 보금자리들이 빼곡했다. 자세히 보면 꼭대기에 가까운 건물일수록 불 켜진 곳이 거의 없었다. 사람들이 일찍 잠들었기 때문은 아닐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러기엔 아직 거리가 왁자지껄했다. 전기를 쓰는 게 여의치 않나 싶어서 신경이 쓰였다. 빈자들의 거리를 비추는 가로등만이 밤을 찬란하게 수놓고 있었다. 키토나 쿠스코의 야경과 비슷한 구석도 있었지만 라파스의 밤은 앞선 것들을 모두 압도할 만큼 아름다웠다. 밤하늘에 떠있어야 할 별들이 내 발아래서 반짝이는 듯했다. 남미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의 처절하게 아름답고 쌉싸름한 밤 풍경을 오래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소소한 여행 팁

1. 푸노에서 라파스까지 가는 버스는 Titicaca Bus를 많이들 추천한다. 주황색이다. 푸노에서 구간 전체 요금을 지불하고 표를 살 수 있다. 다만 국경에서 한번 내리고, 코파카바나에서도 한번 내려서 짐을 다 빼고 기다려야 한다.

2. 라파스 데보라 한인민박을 추천한다. 정말 남미에서 먹은 모든 한식 끼니 중에서 손꼽히는 맛이었다. 다만 전망대나 공항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편이다. 그래도 이동이 필요할 때 사장님이 택시도 불러 주시고 친절하게 안내해주신다.

3. 한인민박 한식이 맛있다고 과식하면 체한다. 고산지대에서는 소화가 정말 잘 되지 않는다.

4. 야경을 보러 갈 때는 여럿이, 숙소에서 불러주는 택시를 타고 가는 것이 좋겠다.

5. 전망대보다 더 나은 사진 스팟을 찾아 동네 쪽으로 조금 내려왔더니 마약에 잔뜩 취해 약을 파는 청년을 만났다. 여럿이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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