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길, 말이 줄어든 하루

by 수미소


주말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겨울비는 눈처럼 소란스럽지 않고, 그렇다고 여름비처럼 시원하지도 않다. 그냥 조용히, 오래 내린다. 창밖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오늘은 굳이 내려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를 핑계 삼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우산을 챙기고, 차 키를 집어 들었다. 효자인 척하는 일에는 날씨가 큰 변명이 되지 않는다.


도로는 젖어 있었고, 시야는 흐렸다. 와이퍼가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소리가 묘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평소보다 속도를 줄였다. 괜히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어머니는 늘 그 자리에 계실 테니까. 급하게 도착한다고 더 효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늦게 간다고 덜 효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가는 길을 멈추지는 않는다.


시골집에 가까워질수록 비는 잦아들었다. 마당에는 물웅덩이가 생겼고, 흙은 눅눅했다. 차를 세우자 어머니가 문을 열고 나오신다. 우산도 쓰지 않으신 채, 비가 거의 그쳤다는 이유로 괜찮다고 하신다. 그 모습이 조금 걱정스러워서 나는 서둘러 다가가 우산을 씌워 드렸다. 어머니는 괜히 웃으며 “이제 네가 다 하네”라고 말씀하신다. 그 말이 칭찬인지, 인정인지, 아니면 그냥 혼잣말인지 알 수 없었다.


집 안에 들어오니 평소보다 조용했다. 라디오는 꺼져 있었고, 난로의 불도 약했다. 어머니는 요즘 귀가 조금 불편하다며 소리를 줄여 놓았다고 하신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괜히 목소리를 크게 낸다. 어머니는 괜찮다며 손을 내젓지만, 나는 그 손짓을 못 본 척한다. 이런 사소한 행동들이 내가 할 수 있는 효도의 전부인 것 같아서다.


점심 준비를 돕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손사래를 치신다. 그래도 나는 부엌에 서서 재료를 씻고, 상을 차린다. 예전에는 어머니의 영역이었던 부엌이 이제는 둘의 공간이 되었다. 어머니는 지켜보고, 나는 움직인다. 그 구도가 아직 완전히 익숙하지는 않지만,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밥을 먹으며 어머니는 오늘따라 말이 적다. 비 때문인지, 몸이 조금 피곤한 탓인지 모르겠다. 나는 괜히 이것저것 묻지 않는다. 말이 줄어든 날에는 침묵도 하나의 대화가 된다. 그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날이 있다.


오후에는 집 안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마당은 질퍽거렸고, 어머니의 걸음도 조심스러워 보였다. 우리는 창가에 나란히 앉아 밖을 바라본다. 빗물이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어머니는 예전에 비 오는 날 논일을 하던 이야기를 꺼내신다. 그 이야기는 앞뒤가 조금 섞여 있었지만, 나는 끼어들지 않았다. 기억이 완벽하지 않아도, 감정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머니는 갑자기 내 손을 본다. “손이 많이 거칠어졌네.”
그 말에 나는 잠시 멈칫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손에 먼저 나타난다는 걸, 어머니는 이미 알고 계셨다. 나는 웃으며 일 때문이라고 대답했지만,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길을 오래 떼지 않으신다. 그 시선이 왠지 오래 남았다.


해가 지기 전, 비는 완전히 그쳤다. 어머니는 문단속을 다시 확인하고, 나는 미끄러운 곳에 신경을 쓴다. 서로 말은 적었지만, 행동은 바빴다. 말이 줄어든 대신, 배려가 늘어난 하루였다.


저녁 무렵 어머니는 “오늘은 그냥 가라”고 하신다. 비 오는 날 운전이 걱정된다는 이유다. 그 말이 고맙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돌아가기로 한다. 효자인 척하는 데에도 타이밍이 있다. 무리해서 머무는 것보다, 안전하게 돌아가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때도 있다.


차에 오르기 전, 어머니는 이번에도 대문 앞에 서신다. 비에 젖은 마당 위에서 손을 흔드신다. 그 모습이 오늘따라 더 작아 보였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출발한다. 와이퍼를 다시 켜고, 젖은 길을 천천히 달린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한다. 오늘 나는 얼마나 효자였을까. 말을 많이 하지도 않았고, 특별한 일을 해드린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함께 비를 보고, 같은 시간을 나눴다. 어쩌면 효도라는 건 거창한 행동이 아니라, 빠지지 않는 출석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85세 어머니 앞에서, 오늘도 나는 효자인 척했다. 그리고 그 척하는 마음 안에는 분명 진짜가 섞여 있었다. 비 오는 주말이 지나가고, 다음 주말이 또 올 것이다. 그때도 나는 아마 같은 길을 달리고 있을 것이다. 말이 더 줄어들지라도, 마음만은 빠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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