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끝까지 가본 사람만 아는 것

변화는 결심이 아니라 누적이다

by 수미소

그건 환희도 아니고,
누군가가 상상하는 화려한 도착도 아니다.
오히려 아주 조용한 고요에 가깝다.

정말로 끝이라고 느껴지는 지점까지 가보면
이상하게도 감정은 소란스럽지 않다.


울음도 분노도 이미 지나가 버린 뒤다.
비명이 터질 것 같았던 마음은
어느 순간 텅 비어버린다.
무거웠던 생각들이 빠져나가고
남은 것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평온함이다.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는데,
더 이상 버거움도 없다.

우리는 흔히
끝에 다다르면 큰 감정이 기다릴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감정이 모두 닳아버린 자리에서
이상하리만큼 고요해진 자신을 마주한다.
그 고요함은 포기가 아니라
이미 충분히 지나왔다는 신호에 가깝다.


끝까지 가는 시간은 대부분 지루하다.
화려한 도약의 순간은 생각보다 아주 짧다.
나머지 대부분의 날들은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이었다.


비슷한 고민,
반복되는 의심,
눈에 띄지 않는 견딤.

그때는 몰랐다.
그 지루함이 곧 실력이었다는 사실을.
특별한 비결이 있었던 게 아니라


어제와 같은 오늘을
한 번 더 살아낸 힘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된다.

사람들은 결과를 보고 쉽게 말한다.


잘했다고,
역시 그럴 줄 알았다고.
하지만 끝까지 가본 사람은 안다.
그 말들이 도착하기 전의 시간들이
얼마나 길고 고요했는지를.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던 구간에서
스스로를 다시 일으켜 세웠던 날들을.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타인의 박수보다
내 안에서 들리는 작은 끄덕임이
더 크게 다가온다.
“그래, 여기까지 왔다.”


그 한마디.

남들은 모르는
나의 비겁함과 나태함,
수없이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까지
모두 알고 있는 나 자신이
조용히 건네는 인정.
그 무게는 생각보다 깊다.


끝에 섰을 때
그곳이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는 것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박수가 울리는 종착역이 아니라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도 되겠구나”라는
담백한 확신이 남는다.
성취의 기쁨보다
이 일을 내려놓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자유에 가깝다.

끝까지 가본다는 건
무언가를 완성하는 일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자신 안에 남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끝은
끝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조용한 허락처럼 다가온다.

그 거리가 얼마나 험난했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몇 번이나 주저앉고 싶었는지도
말로 옮길 수 없다.
그리고 이제는
설명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박수 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발바닥에 남아 있는 굳은살만이
그 시간을 증명한다.


끝까지 가본 사람은
자신의 걸음의 무게를
오직 자신만이 가늠할 수 있다는 걸 안다.

남의 기준에서 벗어나
스스로와만 대화할 수 있는
단단한 내면이 만들어진다.
그 내면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지금도 여전히 길 위에 있다.
완성되지 않았고,
도착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늘의 나는 충분히 서 있다.

끝까지 가본 사람은
더 이상 조급하지 않다.
속도를 잃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리듬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리듬은
누군가의 기대가 아니라
나의 시간으로 만들어졌다.

아직 끝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도
한동안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이미 나는
여러 번의 끝을 지나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 사실만으로
오늘은 조용히 숨을 고른다.


무언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담담한 자기 긍정이다.
내일의 내가
오늘보다 더 나아져야 한다는 명제보다
오늘의 내가
이만큼의 무게를 견디고
무사히 도착했다는 현실이
더 소중하다.

특별한 성취가 없어도,
누구에게 보여줄 만한 결과물이 없어도
나를 관통해 지나간 시간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내 안에
층층이 쌓여
단단한 지층이 된다.
내가 딛고 서 있는 이 땅은
내가 흘린 땀과
말하지 못한 침묵으로 다져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삶은 충분히 존엄하다.


우리는 자주
스스로를 닦달한다.
더 빨리 가야 한다고,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고.
하지만 진정한 성장은
속도에 있지 않다.


자신의 속도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 있다.

끝까지 가본 사람은
그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세상이 정해놓은 지표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이 보내는 신호를
따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뒷모습은
언제나 평온하다.
어디에 있든
그곳이 자신의 자리임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의 끝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안도한다.
무언가를 이루지 못했어도,
어제와 비슷한 오늘이었어도
내가 나로 존재하기 위해
기꺼이 건넨 침묵의 시간들이
나를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면
나는 다시 길을 나설 것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조금 더 가벼운 마음일 것이다.
끝이 무엇인지,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이미 몸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끝을 향해 흐르고 있다.
그 흐름 속에서
우리는 매 순간
조용히 완성되어 간다.


이 밤,
나에게 건네는 가장 따뜻한 위로는
오늘도 무사히
나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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