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 다른 소통의 도구
"너는 별명이 뭐야?"
종이에 써 내려간 한 아이의 질문에 니시미야 쇼코는 대답 대신 사각사각 글씨를 쓴다.
"쇼짱이래!"
그녀의 답변을 읽은 한 여자아이가 소리를 지르자, 같은 별명을 가진 이시다 쇼야는 흠칫 놀라는 눈치다.
처음 전학을 온 날 쇼코는 자기소개를 하라는 담임 선생님의 신호에 가방에서 노트 하나를 꺼냈다.
'만나서 반가워요. 내 이름은 쇼코예요. 나는 이 노트를 통해 여러분과 이야기하고 싶어요. 나는 귀가 들리지 않아요.'
놀람을 쉬이 감추지 못하는 십 대 소년 소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그 순간 무심한 척 샤프 꼭지를 연신 누르며 샤프심을 길게 늘이고 있던 소년 쇼야도 화들짝 놀라 쇼코를 바라본다. 눈 앞에는 그저 평범하고 귀여워 보이는 한 소녀가 서 있을 뿐이었다. 반 아이들은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는 듯 이야기 노트를 적극 활용하기 시작한다. 숙제도 써주고 별명도 물어본다. 그러나 서로가 '다르다'는 것이 그저 자연스럽다는 사실을 알기에는 너무 어리고 미숙한 나이. 서서히 쇼코와의 느린 대화방법에 질려간다.
얼마 후 수화 선생님이 들어와 쇼코와의 소통을 위한 '손말'을 가르쳐준다. 누군가는 노트로도 충분하지 않냐며 짜증을 내고, 누군가는 쇼코와의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배우겠다며 열의를 보이고, 누군가는 상관없다는 듯 그저 무심하다. 고가의 보청기까지 사용하면서 아이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쇼코는 아이들에게서 서서히 소외된다. 쇼야는 그럼에도 늘 똑같은 미소와 친절함을 잃지 않는 쇼코를 지독하게 괴롭힌다.
"나는 너와 친구가 되고 싶어."
도무지 알 수 없는 수화로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는 쇼코를 향해 흙을 뿌리고 화를 낸다. 그 분노가 소녀를 향한 것인지, 자신을 향한 것인지 도무지 모른 채.
모두가 잠든 깊은 밤. 그저 풋풋한 하이틴의 사랑이야기나 볼까,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목소리의 형태>의 감상을 시작한 내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자꾸만 어긋나는 아이들의 서툰 마음과 시선이 아파왔다.
한국 나이로는 일곱 살. 아직 학교 입학 전인 나이에 더블린에서 1학년을 시작하게 된 딸아이와 세 살 많은 아들 녀석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돌아서던 첫날, 우리 부부의 발길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 어른인 우리조차 적응이 안된 낯선 환경 속에 아이들을 먼저 밀어 넣고 도망친 기분이랄까. 다른 모습, 다른 언어의 선생님과 친구들 틈에서 얼마나 떨리고 긴장될까.
환경의 변화에 유난히 민감하고 불안감이 높은 큰 아이와 활달하고 적극적인 둘째 아이. 상반된 성격에 비추어 처음에는 아들 녀석을 무척 걱정했는데 우려와 달리 한국에서 영어학원을 잠시나마 다닌 덕분에 녀석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그러나 한글도 영어도 서툰 딸아이는 한동안 마음을 잡지 못했다. 욕심이 많고 어디서든 관심을 받고 싶은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나서지도 못하고 아이들의 대화에 쉽게 끼지도 못하니 섬처럼 고립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루는 선생님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하교를 한 딸아이가 "엄마, 오늘 남자애들이 나를 발로 찼어!" 하며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순간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차근차근 정황을 물어봤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겠지, 심각한 건 아니겠지. 나 스스로 그런 명분을 찾고 싶어 아이에게 자꾸만 되물었다. 조심스러운 나 대신, 곁에 있던 유일한 한국인 엄마가 적극적으로 나서 주었다. 딸아이가 호명한 남자아이들을 불러 모아 직접적으로 정황과 이유를 물어봤더니 한결같이 그냥 자기를 귀찮게 해서 장난을 치고 겁을 준 거란다. 상황을 종합해보니 아이들과 그저 놀고는 싶고 다가갈 방법은 모르던 딸아이는 한국서 하던 방식처럼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간 모양이었다. 반면 남자아이들끼리 그것도 자기들만의 방식대로 노는데 익숙했던 아이들은 말은 안 통하는데 생경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공간에 훅 들어오는 여자아이가 불편했던 것이다.
어떤 날은 자기보다도 어린 유치원생들이 놀이시간에 자꾸 괴롭힌다고 하소연하기에, "어쩌면 예전에 너처럼 같이 놀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어." 하고 조언했더니 다음날 "엄마 말이 맞았어. 나랑 놀고 싶대"하며 배시시 웃은 적도 있었다. 쉽지 않은 소통의 연속이었다.
그 이후로도 딸아이는 밥을 먹다가도, 자전거를 타고 돌아와서도 "난 외롭다고"라는 말을 불쑥불쑥 내뱉었다. 아직 어릴지라도 아이의 말속에 담긴 묵직함을 알기에 그저 "괜찮아질 거야"하며 토닥토닥해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후 1년을 보내면서 이제는 남자아이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몇몇 단짝 여자 친구들과 서로 집을 오가며 노는 사이가 되기도 했지만 <목소리의 형태>를 보면서 그때가 자꾸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더블린에 도착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 우리 가족은 저녁 식사에 초대를 받았다. 초대를 한 사람은 남편이 공부를 시작한 대학의 교수님과 그의 아내였다. 아이리쉬가 아닌 스리랑카 출신의 이민자인 이들은 우리가 아일랜드에 정착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주었다. 한동안 집을 구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을 때 우리 가족들이 지낼 수 있는 집을 구하도록 중개인과 연결해 주기도 했고, 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공립학교를 알려준 것도 이들이었다.
그날 그 집에서 우리 가족은 다양한 이들을 만났다. 처음 더블린에 와서 집을 구하기까지의 그 한 달 사이 우리가 함께 지낼 수 있도록 기꺼이 자신들 집의 거실과 아들의 방을 내어준 한국인 가족. 그들 집에서 지내는 동안 나와 아이들은 렌트한 집의 가구는 어떻게 사용하고, 주방 식기도구와 보일러, 세탁기 등등은 어떻게 쓰는지, 한국과는 다른 이곳의 주거문화를 톡톡히 익히며 미리 더블린 생활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더블린에 온 지 어느덧 10년이 훌쩍 넘어버린 중국인 가족이 있었다. 남편은 조선족 출신이라 한국어, 영어, 중국어 모두 유창했고, 아내는 중국인이었는데 아홉 살, 일곱 살인 그들의 두 아이는 더블린에서 태어나고 자란지라 오직 영어만 사용하는 아이리쉬였다. 시간이 흐르자, 이탈리아 출신의 교수 한 분과 전형적인 아이리쉬 부부와 그들의 두 아이까지 모두 모였다.
지금까지도 그날의 인상적인 만남을 잊을 수가 없다. 이곳 사람들은 주로 저녁 식사 모임에서 만나면 여러 가지의 음식을 각자의 접시에 담아 식사를 하고 차나 와인 등을 마시며 주야장천 대화를 나눈다(정말 말이 많다!). 그토록 긴 시간 영어를 듣기만 한 것도 처음이었지만, 각 나라의 특색이 담긴 다양한 악센트를 듣고 있자니 장시간 리스닝 테스트를 하는 것처럼 혼란의 연속이었다. 나의 영혼이 자꾸 어디론가 빠져나가려 하는 건 내 빈약한 영어실력 때문이 아니라, 저 억양들 때문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으려고 애를 썼다. 비록 다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손짓과 표정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 모두 웃을 때는 덩달아 웃어도 보고, 심각해할 때는 인상을 써보기도 했다. 지금 와서 그때의 내 모습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본다면 조금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마음만은 편안했다. 자신들도 한때는 모든 것이 낯선 이방인이었기에 마치 혼란스러운 나의 심경을 안다는 듯 정겨운 인사말과 따뜻한 눈빛으로 시종일관 우리 가족을 신경 써주고 있는 이들의 배려가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언어로는 깊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한자리에서 먹고 마시며 주고받은 이날의 훈훈한 온기는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있다.
하루하루 갈수록 아이들은 조금씩 학교생활에 적응해갔다. 오히려 문제는 나였다. 공부하느라 바쁜 남편을 대신하여 더 열심히 학부모로 힘써야 하는데, 한국에서도 제일 힘들었던 학부모 노릇이 역시나 이곳에서도 쉽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아이들의 학교에는 두 명의 한국인 형제가 다니고 있었고 둘은 우리 남매와 각각 같은 반이었다. 이 형제의 부모는 더블린에 정착한 지 12년이 넘은 한국인 이민자였다. 이들 부부가 없었다면 우리 아이들의 학교 생활은 정말 쉽지 않았을 것이다. 숙제가 정확히 뭔지, 아이들과는 어떻게 지내는지, 때마다 진행되는 학교 프로그램에는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 크고 작은 일들이 있을 때마다 나는 큰 도움을 받았다.
시간이 좀 지나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기자, 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 다양한 인종의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중국, 일본,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출신의 부모부터 영국, 프랑스, 체코 러시아, 폴란드, 불가리아 등 세계 각지에서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아일랜드로 건너온 가족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우리를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그중에서도 딸아이와 같은 반 친구인 롤라와 프레야의 엄마는 특별히 내게 신경을 많이 써주었다. 이따금씩 아이들을 집에 초대해 주기도 하고, 셋만의 대화창을 만들어 내가 궁금한 일이 있을 때마다 물어볼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재미있는 이벤트가 있으면 함께 가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특히 롤라의 엄마와 아빠는 체코에서 10여 년 전에 이곳으로 온 후 두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더 세심하게 나를 챙겨주었다. 처음 롤라의 집에 초대된 날, 신이 난 아이들이 한참을 놀다 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구글맵의 도움을 받아 집에 가는 길을 충분히 찾을 수 있다고 하는데도 롤라의 엄마는 롤라의 남동생을 유모차에 태우고 롤라와 함께 우리를 배웅해주겠다고 나섰다. 더 이상 거절할 방법을 몰라 그저 묵묵히 함께 길을 걷고 있는데, 날이 어두워지자 롤라가 조금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괜찮다고 돌아가라는 내게 롤라 엄마는 가는 길을 다시 한번 자세하게 설명하더니 정말 괜찮겠냐고, 갈 수 있냐고 여러 번을 되물었다.
그들을 돌려보내고 다행히 아이들과 나는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런데 그날 밤 롤라 엄마가 장문의 문자를 보내왔다. 혹시나 아까 자신이 잘 갈 수 있냐고 너무 무례하게 다그친 건 아닌지, 집에 그렇게 보내고 나서 내내 마음에 걸렸던지 생각지 못한 사과의 내용을 보내왔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오히려 고맙고 미안했던 내 마음을 겨우겨우 전하고 난 후 그 밤 나는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지면서 내가 가장 고민했던 것은, 잊어버린 수많은 영어단어나 완벽한 문장 구사가 아니라, 상대가 전하고자 하는 뉘앙스를 제대로 이해하고 나 자신 또한 제대로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었다.
20대 때 나는 글을 쓰는 것에 대한 공부를 했고, 한동안 글과 말로 사람들과 소통하며 지내는 일들을 해왔다. 때문에 단어 하나가 주는 울림, 어순이나 어미에 따라 세세하게 달라지는 의미들에 대해 남달리 관심이 많았다. 아이들을 키우며 일을 놓고 가정주부로 오래 살아오느라 이제는 머리, 혀, 몸에 생활의 언어들이 온통 달라붙어 있지만, 그래도 '말과 글'은 죽을 때까지, 언제나 멋지고 의미 있게 쓰고 싶은 소통의 도구 가운데 하나였다.
영어라는 언어로 도구 모드가 전환되면서 갑자기 내 머릿속에 없던 번역기를 들여다 놓고 돌리자니 참으로 막막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 전하고 싶은 속내를 딱 떨어지는 영어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다. 두 언어는 참으로 많은 것이 달랐고 그 간극을 메우는 일은 매번 큰 숙제였다. 하고 싶은 말을 겨우 생각해내면 이미 말할 타임은 놓쳐버린 후였고, 빠르게 흘러가는 대화 속에 끼어들어 정신없이 이 말, 저 말을 던지고 돌아서면 온통 후회가 남았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어. 시제가 틀렸잖아, 그 단어는 적절하지 않았지. 내 속내가 잘 전달되었을까?'
롤라 엄마는 그런 나의 고민을 알고 있었다. 나를 보면서 아마 자신이 처음에 더블린에 왔을 때가 떠올랐을 것이고, 찬찬히 대화를 이어가는 중에도 자신의 심중이 잘 전달될까 내내 마음을 썼던 것 같다. 그녀는 흥미로운 프로그램이 있으니 아이들과 함께 가자고 간혹 문자를 보내면서도 늘 말미에는 "절대 강요하는 건 아냐"라는 메시지를 덧붙이며 세심하게 배려하곤 한다. 그러면서도 만나면 격의 없는 농담을 던지며 편하게 대해주는 그녀가 나는 참 고맙다.
이방인이 되어 이렇듯 도움을 받으며 살다 보니 한편으로 나는 한국에서 만났었던 많은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과 엄마들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다닐 때부터,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몽고, 일본, 필리핀, 루마니아 등 다양한 나라에서 건너온 이방인들이 적지 않았다. 오며 가며 잠깐씩 간단한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그 이상의 관계를 진전시키려 먼저 손을 내밀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혹시 불편하진 않을까, 한국말이 서툴러서 피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솔직히 그들의 속내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그 엄마들도 한국인 친구가 필요했을 텐데, 타국 생활에 여러모로 도움을 주고 정보를 줄 누군가가 절실했을 텐데, 어리석게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치 못했던 그때의 무심한 내가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지곤 한다.
얼마간의 고민 후 나는 어학원이라는 곳에 다니기로 결심했다. 태어나서 처음, 그것도 이 나이에 영어학원에 가자니 참 만감이 교차했지만 한국이 아니어서 오히려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곳에서의 짧은 영어공부는 '역시 영어는 어렸을 때 해야 하는구나. 나의 뇌는 늙고 있구나. 인간의 한계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등등의 자괴감을 안겨주고 끝난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값진 경험이었다.
더블린 시내 한 복판에 나가보니 더블린을 찾아온 여러 나라의 젊은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름을 맞아 단체로 어학연수를 오는 고등학생들도 있고 자국에서보다 더 나은 일을 찾기 위해 건너온 젊은이들도 많았다. 어학원에는 스페인, 이탈리아, 브라질, 중국, 멕시코,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한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십여 명의 사람들이 한 교실에 둘러앉아 수업이 진행되었다. 한국이었다면 일단 몇 년생인지 물으며 호칭 정리부터 들어갔겠지만 고맙게도 그 누구도 내게 나이를 묻지 않았다. 또한 누구 엄마가 아닌 정확한 내 이름을 각기 다양한 발음으로 불러주었다. 호칭이 동등해지니 대하는 방식도 격의가 없이 자유로웠다.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고, 나의 나이를 알게 된 후 깍듯해진 몇몇 한국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편한 관계로 지낼 수 있었다. 마치 대학시절로 돌아간 듯 조금씩 들뜨는 내 맘을 눈치챘는지 남편은 어학원 다닌 후 내가 부쩍 밝아졌다며 기뻐했다.
어학원에 있다 보면 개별적인 차이가 분명히 있긴 하지만 나라별로 특징들이 조금씩 드러난다. 한국인들은 대부분 조용하고 신중하고 수업에 열중하는 모범생 이미지가 강하다. 영어와 비교적 비슷하고 친숙한 언어를 사용해온 다른 나라 사람들은 문법에 맞든 안 맞든 일단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하지만 그리 오랜 시간 영어공부에 시달려온 나를 비롯한 한국사람들은 한마디 말을 꺼내는 데도 조심스럽다. 내가 다닌 학원에는 특히 브라질과 멕시코 학생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자유분방함과 활달함에 기가 눌릴 정도였다. 수업 시간에도 언제든 하고 싶은 말이나 질문이 있으면 거침없이 나서고, 안면을 트고 나면 오랜 친구처럼 살갑게 대하며 스킨십도 무척 자연스러워 나 역시도 쉽게 마음을 열 수 있었다.
수업 첫날부터 내내 같은 반이었던 20대의 멕시칸 부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평소와 다르게 볼 뽀뽀로 인사를 건네 왔다. 엉겁결에 와이프에게는 두 볼을 내어주었는데, 그다음 다가온 남편에게는 손사래를 치고 말았다. 물론 농담 반 진담 반의 행동이었지만, 그는 장난처럼 서운한 티를 내며 돌아섰다. 어느덧 고리타분한 중년이 되어 다른 형식의 인사도 자연스럽게 받지 못하는 내가 뒤늦게 한탄스러웠지만, 그날 나는 그들이 나를 친구로 대해준 것에 대해 무척 감동했다. 표현 방식은 달라도 우리는 모두 서로를 다독거리고 응원하는 친구였다.
이곳에 날아온 사람들은 비싼 더블린의 방값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일을 구하고, 한집에 스무 명, 한방에 다섯 명인 숙소에서도 기꺼이 생활하는가 하면, 하루에 한두 끼만 먹으면서도 악착같이 돈을 모아 아일랜드 주변의 유럽으로 열심히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레스토랑이나 펍에서 밤늦게까지 서빙이나 설거지를 하거나, 어린아이를 돌보는 보모일, 주유소, 카센터 등에서 주어진 각자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아침에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학원에 나와 영어를 배우는 모습이 이모뻘인 내 눈에는 참 기특해 보였다. 나 역시 20대 후반에 직장을 그만두고 어학연수를 갈까 망설였던 적이 있었지만 정작 이곳에서 일과 공부를 치열하게 병행하는 젊은이들을 보니, 나는 내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이처럼 열심히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어학연수를 온 젊은 학생들, 한창 직장생활을 하다가 지쳐서 이젠 뭔가 자신의 길을 찾고 싶은 마음에 모두 놓고 떠나온 30대, 여행을 너무 좋아해서 부부가 직장을 그만두고 함께 여행과 공부를 병행하고 있는 신혼부부 등 더블린에서 만난 다양한 한국 유학생들 역시 저마다 열심히 자기만의 삶을 찾아 애쓰고 있었다. 분주하게 작동하는 그들의 에너지는 분명 내게 큰 자극이 되어 주었다. 새로운 환경, 사람, 언어에 대해 그리 겁먹지 말아야지. 어느덧 내게도 그런 용기가 조금씩 움트고 있었다.
어긋나 버린 쇼야와 쇼코는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쇼코는 결국 학교를 떠났고, 남은 쇼야는 왕따 가해자로 찍혀 다른 친구들에게 똑같이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모든 사람들과의 소통을 끊고, 자신의 삶도 언젠가 스스로 끝내겠다는 마음만으로 살아가던 쇼야는 몇 년 후 다시 쇼코와 마주친다. 자신을 보고 도망치는 소녀에게 예전의 이야기 노트를 건네주며 그는 그동안 배워온 수화를 이어간다.
"나는 너와 친구가 되고 싶어"
자신의 손짓에 스스로 놀란 쇼야는 그제야 예전에 쇼코가 자신에게 했던 손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어느덧 쇼야를 좋아하게 된 쇼코는 그에게 글이나 수화가 아닌 그가 사용하는 목소리로 고백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좋아해!"라고 용기를 내어 소리치지만 쇼야는 그녀의 부정확한 발음 때문에 비슷한 발음의 일본어인"달"이라는 말로 알아듣는다. 쇼코는 많은 길을 돌아왔음에도 그다지 좁혀지지 않는 소통의 간극에 절망한다. 지금까지도 나는 쇼코가 슬퍼하던 그 장면이 너무 아프면서도 예쁘다. 목소리를 통한 말이든, 노트에 쓰는 글이든, 손짓이든 어떤 도구를 사용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대화하고픈, 혹은 나와 대화하고자 하는 상대에게 눈높이를 맞춰주고 싶은 마음. 그것이 진정한 소통의 시작이었다.
돌아보니 지금껏 내가 가장 소통하기 힘들었던 상대는 다른 언어를 쓰는 외국인이 아니었다. 바로 나의 아이들이었다. 아직 말을 못 하는 아가였을 때 나는 얼마나 아이들의 눈빛과 소리와 손발 짓에 세심히 관심을 기울였을까, 말을 익혀가고 글을 쓰기 시작한 후에는 동등하게 그들의 언어를 들어줬을까.
아이의 욕구보다는 나의 계획과 생각대로 이끄는 것이 더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한 적이 많았고,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왜 그렇게 말하니, 그건 틀렸어. 이렇게 쓰는 거야." 하면서 종종 가르치려고 들었다. 아이의 말속에 담긴 진짜 속내와 이유를 알기 위해 눈빛을 맞추기보다는 그들이 나에게 맞춰주기를 더 바랐던 것이다.
사랑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꼭 말로 해야 아냐고들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표현해줘야 한다. 나만의 방식이 아니라, 쇼코와 쇼야처럼 상대가 듣고 싶고 느낄 수 있는 방법으로.
힘든 길을 돌고 돌아 비로소 서로 얼굴을 마주하게 된 영화 속의 두 사람처럼 상대가 원하는 방법으로 소통하는 법을 익히기까지 애쓰는 과정은 최상의 난코스지만 분명 가치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늦었다고 비겁하게 변명만 하지 말고 이제라도 더 열심히 영어를 공부해야겠다. 그리고 아이들의 계속될 푸념에도 열심히 귀 기울여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