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섬콩 Aug 04. 2017

친절한 더블리너 씨

 더블린에서 만난 사람들

갑자기 환경이 바뀌게 되자, 새삼 제일 먼저 겁이 나는 일은 사람, 바로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종족을 만나고 사귀는 일이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사람들을 만나도 말이 술술 통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도무지 대화가 풀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 더 깊이 들어가 개인의 취향들을 꺼내다 보면 더더욱 낯가림은 심해진다. 나이 들수록 많은 사람들을 겪고 경험했기 때문에 더 다양한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는 노하우가 생길 것도 같지만, 한편으로는 이 소중한 시간, 이 한정된 에너지를 가지고 굳이 말도 마음도 안 맞는 사람과 마주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옹졸한 생각에 점점 인간관계가 좁아지기도 한다.

하물며 언어가 다른 사람과는 어떻겠는가.

아주 오랜 시간 영어라는 것을 놓고 살았던 나의 경우는 그야말로 두려움 그 자체였다. 더블린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낯선 얼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입을 떼야할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내 평생에 가장 과묵하고 소심한 캐릭터로 살아가야 할 날들이 눈앞에 놓여있었다.



Thanks a million & Sorry

더블린에 도착한 그다음 날부터 집 구하랴, 아이들 학교 알아보랴, 틈틈이 시내 구경도 하랴, 이곳저곳을 누비느라 분주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잔뜩 움츠렸던 처음의 긴장감이 스르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별다른 대화가 오간 것은 아니었다. 버스를 타거나 LUAS(더블린 시내를 오가는 일종의 트램) 안에서 느껴지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저 편안했다. 낯선 동양인에 대한 경계나 불편한 호기심이 그다지 피부로 와 닿지 않았다. 더욱 신기했던 것은, 하루 내내 낯선 이들에게 들었던 'Thank you와 Sorry'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정말 고마울 때 더블린 사람들은 "Thanks a million"이란 말을 자주 사용한다. (우리말로 하면 하늘땅만큼 고마워! 뭐 그런 의미 일라나)

아무튼, 좁은 길을 오가다 살짝 몸을 스치거나 서로 마주치기만 해도 그들에게서는 일단 미안하다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먼저 가라고 길을 비켜주거나 조금 기다려주면 고맙다는 인사도 절대 잊지 않는다. 더 지내고 보니 이것은 아주 일상화된 이들의 문화였다. 그저 가식이라고 하기엔 친근한 표정과 말이 함께 몸에 익어서 매우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은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인 나 역시 그렇게 응대해줘야 할 최소한의 매너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이런 매너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거나 말을 주고받는 것이 그다지 편하지만은 않았던 생활 속에서 이런 인사를 잊고 살았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매일 낯선 이들 속을 누벼야 하는 삶이 퍽퍽한 이방인에게 던져지는 다정한 땡큐와 쏘리는 이따금씩 묘한 위안이 돼주었다. 그리고 더블린에서 1년 넘게 지내면서 땡큐와 쏘리를 열심히 쓰다 보니 가끔은 두 단어가 반대로 튀어나오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생기곤 했다.




사람 나고 차 났지, 차 나고 사람 났나.

아일랜드의 인구는 대략 5백만 명, 더블린은 약 1백2십만 명이라고 한다. 한국의 면적이 조금 더 크긴 하지만, 두 세배도 아닌데 인구가 5천만 명인 것을 생각하면, 아일랜드는 참 인구가 적은 나라다. 간혹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는 택시 기사에게 "대한민국에서 왔고 내가 살았던 서울이란 도시의 인구는 거의 1천만 명이다."라고 말하면 대부분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반대로 나의 경우,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을 돌아보며 다른 이유로 조금 놀랐다. 널찍한 광화문 광장, 복잡한 8차선 도로, 하늘을 가리는 높은 빌딩을 자랑하는 수도 서울과는 달리, 10층 이상의 건물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넓어야 4차선, 대부분은 2차선 정도의 오밀조밀한 도로가 대부분인 더블린이 참 신기했다. 현대식 대도시와는 거리가 먼 아담한 규모가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겹다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차들도 천천히 달리고 2층 버스들도 그리 서두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찻길 건너기. 더블린에서 만난 한국사람들과 가끔 농담으로 "아무렇지 않게 '무단횡단'하는 거 보면 더블리너 다 됐네." 하며 놀리곤 하는데 이곳 사람들은 정말 어디서든 주저 없이 도로를 건넌다. 처음에는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무단횡단으로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한국에서의 불법적인 무단횡단과는 다른 자연스러운 관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내 한 복판이든, 한가로운 도시 근교의 주택가 도로에서든 길을 다니다 보면 이곳에서는 '차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일단 사람과 차가 만나는 좁은 통로 같은 곳에서 대부분의 차들은 일찍부터 사람이 지나기를 기다려주며 먼저 가라고 손짓을  해준다. 한적한 동네 찻길 신호등 앞에서 내가 아이들과 손을 잡고 서 있을 때면, 빨간 불인데도 일부러 멈춰서 지나가라고 손짓하는 운전자들도 참 많았다. 행여 빨간불인데 마구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어도 그냥 가다 서서 기다려줄 뿐 클랙슨을 누르거나 창문을 열고 소리를 지르는 운전자를 아직 본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도로에 차가 없을 때는 자연스럽게 길을 건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안전하니까. 마치 서로 조심하고 존중해주면 괜찮을 거라는 암묵적인 소통이 오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버스 운전사의 친절에 감동한 적도 몇 번 있었다. 한번은 친구와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내릴 정류장을 놓쳐서 당황하고 있는데, 내 표정을 읽었는지 버스기사가 무슨 일이냐고 먼저 물어보았다. 나는 최종 어디까지 가야 하는데, 내려서 갈아탈 곳을 지난 것 같다고 더듬더듬 얘기했더니, 너는 어디에 내려서 길을 건너서 몇 번을 다시 타고 어디까지 가야 한다고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또 언젠가는 내가 타고 있는 버스가 한 정류장에서 사람을 태우고 있었는데, 그 버스를 탈 계획이 없는 낯선 사람이 밖에서 기사에게 길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승객들이 모두 기다리는데 그 기사는 앞문을 연채 거의 5분 동안은 그 사람에게 세세히 길을 알려주었다. 더 놀란 것은 승객들 중 누구도 그 사이 왜 이렇게 지체하냐고 항의하는 이들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속 터질 느긋함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한 시간에 한 대씩 버스가 오는 동네에 살고 있는 입장에서 이곳 사람들의 이런 여유와(?) 한없는 끈기는 언제 다시 한 번 끄적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느 날은 남편과 나, 그리고 한국에서 날아온 내 친구와 셋이 버스를 타고 IMMA( Irish Museum of Modern Art)에 가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찻길을 건너려고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는데, 우리를 내려준 버스가 출발하지 않고 정류장에 계속 서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시선을 돌리다가 기사와 눈이 마주쳤는데, 마침 우리를 뚫어지게 보고 있던 기사가 이리 오라고 손짓을 해댔다. 설마 요금에 뭔가 문제가 있었나 걱정하며 다가갔더니, 대뜸 너희 어디 가냐고 물었다. 미술관에 간다고 했더니, "그럼 여기서 길 건너서 저기 골목길로 가서 좌회전하고... "우리를 길 잃은 어린양으로 생각해서 못 가고 있었던지 친절한 기사 아저씨의 오지랖은 여지없이 발휘되었다.

서울 한 복판에 살 적에, 차 한 대가 지날만한 좁은 골목길을 두 아이와 손잡고 자주 걷곤 했다. 그때 앞 뒤로 차가 들어서기라도 하면 참으로 난감했다. 빵빵 눌러대며 서로 비키라고 신호를 보내는 자동차들 사이에서 벽에 딱 붙어서는 '사람 나고 차 났지, 차 나고 사람 났니?' 부글부글 끓는 속으로 얼마나 읊어댔던가. 요즘은 "맞아 사람이 먼저인 거였어." 그런 당연한 생각을 아주 자주 한다.

 


Welcome to Ireland!

아일랜드에 와서 가장 감동했던 일을 고르라면, 주저 없이 우리 동네 아이들의 아름다운 환영인사를 꼽을 것이다. 더블린에 온 지 한 달만에 집을 구해 이사를 했을 때가 작년 7월이었다. 한국은 아직 여름방학 전이었지만 이곳은 7월과 8월, 2개월 동안 가장 긴 방학시즌이 주어진다. 이사 후 만난 이웃들은 먼저 반갑다는 인사를 건네주고, 길에서 눈만 마주쳐도 "Hi, Hello"를 던지는 다정한 이들이었지만, 새로운 나라에서의 본격적인 가정생활은 서툴고 낯설기만 했다. 아직 초등학교 새 학기가 시작되려면 멀었고, 그저 한국이 그립기만 했던 우리 집의 남매 또한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안되었던지 문만 열면 드넓은 잔디와 벌판인데도 한동안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블린의 여름은 유난히 하루하루가 길다. 새벽 6시 전에 뜬 해가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지기 때문이다. 귀를 기울이니 저녁을 먹은 후 밖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보니 우리 집 앞은 똑같은 모양으로 쭈욱 늘어서 타운을 이룬 공간의 모퉁이에 위치했기 때문에 아이들이 차들을 피해 놀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어린아이부터 10대 소녀들까지 축구, 농구, 자전거 타기, 물총 싸움 등 다양한 놀이가 펼쳐졌다. 어느 날 창문에 붙어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7살 딸아이가 덤블링을 하는 한 소녀를 향해 저도 모르게 "와우!"하고 찬사를 보냈다. 열한두 살쯤 되어 보이는 그 소녀는 소리가 나는 창문 쪽으로 다가와 환히 웃으며 나의 딸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너 참 귀엽다. 몇 살이니?" 수줍게 대화를 이어가다가 어느덧 용기가 생겼는지 우리 집 남매들은 드디어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서툰 영어와 몸짓을 이어가며 그날 밤이슬을 맞도록 한참을 놀다가 들어왔다.


신기한 일은 다음날에 일어났다. 한낮이었는데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만 찾아와도 바짝 긴장을 하던 내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더니, 어제 함께 놀았던 소녀들 중 세 명이 환한 미소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작은 접시가 하나 들려 있었는데, 먹음직스러운 브라우니 위에 종이로 만든 아일랜드 국기와 대한민국 국기가 옹기종기 꽂혀 있었다.

"Welcome to Ireland!"

연습이라도 한 듯 소녀들은 입을 맞추며 우리에게 접시를 내밀었다.

놀람과 기쁨, 당황과 감동이 동시에 밀려온 나는 일단 그들을 안으로 초대했다. 직접 손으로 만들어 구웠다는 브라우니와 인터넷을 뒤져 하나하나 그리고 색칠했을 태극기를 보니 정말 "Surprise" 그 자체였다. 영어가 서투니 이해해 달라며 대화를 시도하는 내게 "우리도 한국말을 전혀 모르니 괜찮다"라고 대답하는 소녀들의 매너에 또다시 감동 먹은 나.

양해를 구해 함께 사진을 찍고 통성명을 하고 돌아간 그 소녀들은 지금도 길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한국이었다면 말 걸기가 쉽지 않은 까칠한 사춘기 초입이거나, 핸드폰에 빠져 밖으로 잘 안 나오거나 영어, 수학 학원을 도느라 동네에서 뛰어노는 걸 보기 쉽지 않은 나이일 텐데, 또다시 방학이 한창인 요즘, 이 아이들의 활기찬 여름 놀이는 시작되고 있다.



친절한 더블리너 씨 그리고 '나'

불과 1년 남짓 더블린에서 지낸 내가 모든 더블리너들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마치 동화책 속 주인공 같은 선한 사람들이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가끔은 루아스 안에서 중국말로 농담을 던지며 놀리는 십 대들도 있었고, 택시 안에서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냉기를 뿜던 기사도 있었고, 버스에 너무 늦게 올라탔다고 뭐라 빈정대는 운전사도 있었다. 사람 사는 세상 어디나 다양한 캐릭터가 존재하고 각자의 삶과 맥락에 따라 타인에게 말하고 행동하기 나름이다.

그럼에도 내가 더블리너들이 유독 친절하다고 얘기할 수 있는 이유는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처음 경험해본 나의 첫 각인 같은 거랄까. 어떤 날은 정말 막막하고 힘들었을 때 다가와준 그 누군가가 전부로 느껴지는 것처럼 그런 고맙고 다정한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곳은 아니었지만, 이곳에서 몇몇 유럽 나라들을 다녀와보니 더블린 사람들의 친절과 소박함이 더 매력으로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이젠 나도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먼저 던지는 "Hi, Good Morning" 등등의 인사에 눈을 피하지 않고 화답할 줄도 알게 되었고, 요즘은 루아스 안에서 "너의 딸은 정말 귀엽다" 말로 시작해 내릴 때까지 자신의 가족사를 쭈욱 훑었던 어느 아주머니의 친근한 수다가 그리워  안에서 사람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기도 한다. 어느 , 누구에게나 '허니문' 같은 달콤한 시기가 있는 법이라 처음에는 더블린이라는 환경과 이곳 사람들의 긍정적은 면들이 한껏 부각되어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시간이 갈수록 무뎌지고 무심해지는 나에게 놀라기도 한다.

결국 사람살이란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무언가가 있고, 소통과 공감이 이루어져야 그 관계가 더 발전하고 인연이 만들어지는가 보다. 이제 와서 반대로 생각해보면, 더블린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나'라는 이방인이 처음에는 신기한 대상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탐색기간이 지나면 이제는 일상과 현실의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 1년 동안 복잡한 서울에서의 인간관계를 벗어나 혼자만의 한가로움을 맘껏 누린 나는, 이제는 이곳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또 다른 숙제를 앞에 두고 있다.

길을 오가다 부딪친 사람에게는 당연히 미안하다 사과하고, 길을 가르쳐준 누군가에는 최고의 감사를 표현할 줄 알지만 매일 살을 맞대고 비비며 사는 가족에게는 가장 함부로 말하고 상처를 주곤 하는 것이 또한 사람이 아니던가.

내게 맘을 주었다 생각하면 더 쉽게 대하고 내가 맘을 주었다 생각하면 무언가를 바라게 되는 기묘한 사람의 심리.

얽히고설키는 '리얼 인간관계' 앞에서 나는 이들에게 진정 '친절한 누구 씨'로 남을 수도 있고, 무심한 이방인으로 스쳐 지나갈 수도 있다. 지금껏 이방인의 입장에서 친절을 받기만 했다면 어찌 됐든 이제는 내 할 몫이다.




이전 02화 Where is the sun?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