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고 느린 더블린 vs 빠르고 편리했던 서울
"우리 오늘 어디 갈 거야. 저기 가서 밥 먹을 거야. 그리고 누구 만날 거야."
"싫어! 안 가고 싶어, 안 먹을 거야. 만나기 싫어!"
자기 의사를 말로 표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큰 아이가 내뱉는 반응은 대체로 이런 것들이었다. 아니, 어쩌면 말을 하기 이전부터였다. 아이가 막 걷기 시작한 두 살 때쯤 여름휴가로 화진포 바닷가에 간 적이 있다. 우리 부부는 모래사장에서 아장아장 걸으며 활짝 웃는 녀석의 모습을 상상하며 미리 흐뭇했다. 그러나 웬걸. 녀석은 모래에 발이 닿자마자 0.1초도 되지 않아 울어댔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팔과 다리를 뒤흔들며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는 모래에 발이 닿지 않도록 아이를 안고 업고 목마를 태우며 겨우 달랬다. 여섯 살이었나, 처음으로 청국장 집에 데려갔을 때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녀석은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들리도록 "아휴 발꼬락 냄새! 똥꼬 냄새!" 하고 소리를 질러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더 당황스러운 일은, 그래 놓고선 언제 그랬냐는 듯 청국장에 밥을 쓱쓱 비벼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는 것이다.
불안 때문이었다.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무서워서 경험하기도 전에 미리부터 싫다고 밀어내는 녀석의 모습에서 내가 보였다. 그 불편함이 편한 익숙함으로 바뀌기까지의 과정을 힘겨워하는 것까지도 어쩌면 그렇게 나를 닮았을까.
그래도 나이를 헛 먹은 것은 아닌지, 많은 경험과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나는 스스로 많이 여유로워졌다고 생각했다. 미리 준비하고 마음만 굳게 먹으면 그 과정이 더 쉬울 수 있다고 나에게 그리고 아이에게, 더블린에 오기 전부터 내내 다짐해 온 터였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고비고비를 잘 넘기며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 하지만 불편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물론 편함과 불편함의 기준은 상대적인 것이기에, 이전의 서울 생활과 비교를 할 수밖에 없고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생각이 반영되기 마련이지만 더블린을 방문하거나 이곳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들에게도 약간 도움이 될만한 불편사항들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아일랜드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소재인 날씨에 대해서는 이전에 언급한 적이 있지만, 역시나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1년 넘게 지내보니, 개인적으로 아일랜드에서 제일 날씨가 좋은 때는 6, 7, 8월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일단 서울과 비교하면 여름인데도 많이 덥지 않다. 이곳에서 잘 볼 수 없는 가전제품은 선풍기와 에어컨이다. 아주 햇볕이 뜨거운 날 승용차 안에서는 에어컨이 가끔 필요하기도 하지만, 가정에서는 문만 활짝 열어도 시원한 자연바람이 그나마의 더위마저 말끔히 날려준다.
작년과 올해, 한국에서 더위에 몸살을 앓는 가족과 지인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한편으로 많이 미안했다. 게다가 여름에는 해가 길어서 밤 10시까지 환하기 때문에 낮시간을 보너스로 더 얻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해가 강할 때는 너무 뜨겁고, 구름이 드리운 날은 또 으스스 추워서 여름에도 나는 늘 얇은 긴팔 옷을 주로 입고 다녔는데, 바람과 추위에 단련된 이곳 사람들은 5, 6월부터 소매 없는 옷을 입고 다니고, 바다 수영도 종종 즐기며 나름 여름을 만끽한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이 그나마 덥다고 하는 날도 한국의 폭염 더위에 비할바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 가족에게 실외 수영은 아직 먼 얘기다.
반면 서서히 추워지기 시작하는 9월 중순부터는 몸과 마음의 월동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일교차가 너무 커서 아침에는 패딩점퍼를 입어도 무리가 없다. 물론 낮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선선한 초가을의 날씨로 돌아오지만 밤이 되면 다시 초겨울이다. 이때부터 해가 짧아지기 시작해, 11, 12, 1, 2월로 이어지는 겨울에는 오전 8시 넘어서 해가 뜨고, 4시 이후면 해가 지기 시작한다. 8시 15분까지 학교에 가야 하는 우리 아이들은 덕분에 달을 보며 등교하고 하교 후 집으로 돌아와서 한두 시간 뭐 하다 보면 밤을 맞는다. 이 계절에는 유난히 비바람의 변덕도 심하고 바깥도 늘 어두워서 자칫 집안의 우환이라도 겹치면 우울의 늪에 빠지기 쉽다.
더블린이 서울보다 더 춥냐고 묻는다면 단번에 대답하기 어렵다. 더블린의 기온은 영하로 거의 내려가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체감온도는 서울보다 더 낮다. 온종일 부는 바람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내가 한국만큼 따뜻하지 않은 이유가 크다. 한국에서는 밖이 아무리 추워도 일단 집으로 들어오면 뜨끈한 온돌과 보일러가 있어서 실내에서 반팔을 입어도 될 만큼 훈훈하다. 하지만 이곳의 집들은 일단 바닥 보일러가 거의 없어서 밖과 안이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에는 바닥 보일러도 깔고 좋은 단열재로 난방을 보완하고 있는 집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옛날 집의 경우 라디에이터가 방방마다 있지만 가열해도 라디에이터 앞 1m 이내 정도만 따뜻할 뿐이어서 큰 효과가 없다. 게다가 가스료나 전기료도 비싼 편이라 하루에 기껏해야 두세 시간만 아껴서 겨우 틀곤 한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두세 겹 내복을 입고, 침대마다 전기담요를 깔고, 너무 추울 때는 작은 온풍기를 이방 저 방으로 들고 다니면서 추위에 맞서는 방법을 터득해왔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말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로 비바람이 굉장히 심한 날도 1년에 서너 번씩 온다. 어차피 날아갈 테니 우산도 필요 없고, 비옷을 입어도 다 젖을 것이 뻔한 그런 날은 큰 맘먹고 집 앞으로 택시를 불러 학교에 가야 한다. 지난겨울 하교시간에 어마어마한 비바람이 분 적이 있다. 택시를 타려면 100m 정도 걸어 나가야 했는데, 잠깐 딸아이의 손을 놓은 사이 아이가 저 앞으로 붕 떠서 날아가 잔디밭을 구르기도 했다.
게다가 근 1년 사이 우리 부부는 중이염, 축농증, 눈 떨림, 이석증, 원인 모를 턱의 통증, 대상포진 등 한국에서 앓아본 적이 없는 다양한 질병들을 경험했다. 이곳에서 오래 살아온 한국인 지인들에게 문의를 해보니 신기하게도 비슷한 병을 미리 경험한 이들이 많았는데, 아마도 환경과 기후 변화로 인한 면역력 저하, 햇빛 부족으로 인한 비타민과 마그네슘 결핍, 스트레스 등과 연관이 있는 듯했다. 작년 10월과 올해 4월에 우리 집을 방문했던 나의 친구와 시누이도 와서 1주일 정도는 기침감기약을 먹으며 와병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이곳을 오고자 하는 지인들에게 겨울은 제발 피해달라고 부탁을 한다. 이제 우리는 환경에 맞서기보다는 순응해야 하는 나이인 것을 서서히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환경 적응이 빠른 아이들에게는 이곳의 기후와 맑은 공기가 오히려 좋은 영향을 주고 있다. 서울에서는 한 달이 멀다 하고 소아과에 다니며 항생제를 먹었는데, 이곳에서는 아직까지 열 한 번 난 적이 없이 건강해서 병원에 갈 일이 없었다. 하지만 더블린에서 우리 아이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매년 한국에서 다녔던 워터파크와 눈썰매장이다. 가고 싶다고 부르짖는 남매의 등쌀에 더블린에 비슷한 곳이라도 있는지 수소문했지만 결국 나는 워터파크 같은 곳은 찾지 못했다. 게다가 더블린에서 우박이나 진눈깨비는 종종 보았지만 눈이라고 인정할만한 진정한 눈을 아직까지 보지 못했으니, 눈썰매장은 동화 속 이야기일 뿐이다.
더블린에서 집을 구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 다들 "Crazy!"를 소리 높여 외친다. 한국에서도 사정은 비슷했지만, 이곳에서도 집을 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렌트하는 것도 어렵고 구하더라도 비싼 렌트비용에 또 한 번 놀란다. 우리처럼 4명의 가족이 몇 년간 거주해야 하는 경우는 더욱 쉽지 않았다. 첫 번째 난관은 일단 집을 찾는 것이었다. 'Daft'라는 앱을 통해 사거나 렌트하거나 셰어 할 수 있는 집을 알아보는 것이 보편적인 방법인데, 마음에 드는 집이나 방이 있으면 일단 집주인에게 메일을 보내거나 전화를 하는 것이 순서다. 그렇다고 집을 보러 오라고 모두 연락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연락이 와서 시간을 맞춰 가더라도 집주인이나 중개인의 '면접' 비슷한 것을 통과해야 한다.
나와 아이들보다 3개월 먼저 더블린에 와 있었던 남편은 그 사이 렌트를 완료한 후 우리와 합류할 예정이었다. 그 3개월 동안 수십 통의 숱한 메일을 보내고 집을 보러 다녔지만 자신보다는 집주인의 결정에 모든 것이 달린 완전한 '을'의 입장이기에 번번이 좌절을 겪어야 했다. 이곳에서는 렌트하는 사람의 신원이 확실한지, 렌트 비용을 계속 낼 수 있는 상태인지, 집을 잘 사용할만한 사람들인지, 보다 구체적으로 조건을 따지는 경우가 많아서 외국인인 데다가 어린아이들까지 있는 우리 가족의 조건이 다른 이들보다 밀릴 확률이 높았던 것이다. 나중에는 신원을 보증한다는 교수님의 추천서까지 첨부했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집을 구하지 못한 채 4명의 가족 완전체가 더블린에서 만난 바로 다음 날, 갑자기 남편의 교수 아내로부터 집을 하나 보러 가자는 연락이 왔다. 그녀의 인근에 사는 지인이 한 달 후 이사를 가려고 집을 내놨으니 비공식적으로 중간에 살짝 끼어서 보자는 것이었다. 가릴 것이 없었던 나와 남편은 시차 적응도 안된 상태에서 집을 보러 갔고, 혹시나 다른 얘기가 나올세라 대강 둘러본 후 5분 만에 계약 결정을 내렸다. 그때는 집의 위치나 교통, 환경이나 집안의 상태 등을 고려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저 우리 네 가족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정해지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리고 '인맥 찬스'에 힘입어 마침내 계약에 성공했다.
이사 후 하루하루 지내면서 나중에서야 우리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지인들에게 들은 바로는, 더블린도 서울처럼 동네마다 집값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다. 특히 더블린 시내 가운데에 흐르고 있는 리피강을 중심으로 강남은 북쪽보다 환경이 좋은 편이고 치안 면에서도 안전한 대신 그만큼 가격이 더욱 높았다.
우리가 얻은 집은 강의 남쪽이었고 아이들이 뛰어놀기에는 최적의 환경을 갖춘 곳이었다. 물론 더블린 시티센터까지 1시간 정도가 걸리고 아이들의 학교도 가깝지는 않았지만 좋은 공기 마시며 매일 집 안팎을 오갈 때마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한국과 비교했을 때 렌트비용의 부담이 너무 크다는 단점이 치명적이긴 하다. 그래서 이민을 오거나 장기간 머무는 경우 대출이나 모기지론을 활용하여 집을 구입하는 이들도 간혹 볼 수 있었다.
더블린에서의 월세살이는 한국에서의 전세나 월세살이와는 조금 다르다. 이곳에서도 조건이 천차만별이기는 하지만 더블린의 집에는 기본적인 가구, 예를 들면 우리 집에는 냉장고와 가스레인지, 식기세척기, 오븐, 세탁기, 침대, 소파, 벽장 등은 구비되어 있었다. 우리가 처음 한 달간 신세를 졌던 한국인 가족 집의 경우 그릇, 냄비 등을 포함한 일체의 주방용품과 책장, TV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때문에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이사를 하기에는 더없이 편하다. 반면 내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집을 다시 떠나기 전까지는 조심히 사용해야 한다. 계약서에 모든 사항이 꼼꼼히 적혀있어서 훼손을 시키거나 문제가 생기면 마지막에 모두 배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주변에서 본 대다수 아일랜드 사람들은 집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집안을 꾸미는 데도 관심이 많지만, 작은 정원 하나라도 무척 꼼꼼하고 예쁘게 가꾼다. 우리가 이사 올 때 부동산 중개인은 "집주인이 새로운 잔디깎이 기계를 사놨으니 정기적으로 잔디를 관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영화에서나 보고 듣던 얘기에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한두 달 지내다 보니 그 얼마나 진지한 얘기였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 넓진 않은 뒷마당에만 열 종류 이상의 꽃과 나무들이 심겨 있었는데, 꽃이 피고 지는 시기가 제각기 달랐다. 그리고 잔디는 또 얼마나 빨리 자라는지 동네 이 집 저 집에서 때마다 잔디 깎는 소리가 들릴 때면 우리도 뭘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한국에서 아파트와 연립주택만 옮겨 살면서 한 번도 정원이라는 걸 가꿔보지 못한 우리 부부인지라 정글처럼 울창해지는 나무들을 보며 "그저 보기 좋네" 하고 허허 웃을 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집을 중심으로 양 옆집에 사는 분들의 내 집 사랑과 정원 가꾸는 스킬이 남다르다는 데에 있었다.
이사 온 후 집주인은 우리를 걱정해서인지 딱 한번 정원관리사를 보내준 적이 있었다. 그가 정원을 정리하고 돌아간 후 왼쪽 집에 사는 아주머니가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 집과 그 집은 얇은 나무 담 하나로 정원이 나뉘어 있었는데, 우리 집에서 시작된 담쟁이가 자꾸 그 집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실은 그것이 불편해서 자기가 종종 잘라내곤 했는데, 정원관리사가 올 줄 알았다면 미리 그것을 처리해달라고 부탁했을 거라며 아쉬움을 전했다. 이후 가끔씩 담쟁이도 살필 겸 우리 집 창문 너머로 그 집 정원을 살펴보았더니, 작은 담쟁이 잎 몇 개에도 신경이 쓰일 만큼 정말 우아함과 깔끔 그 자체였다.
또 어느 휴일에는 오른쪽 집의 아주머니가 초인종을 눌러서 나가보니 손에는 가지를 자르는 작은 정원용 가위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환한 얼굴로 "내가 이 가위 빌려 줄테니까, 집 앞에 있는 너희 집 나무 좀 다듬을래?"하고 물었다. 너무 친절하고 상냥했지만 실은 "제발 너희 집 나무 좀 다듬어줘!"라는 간곡한 표현이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우리 나무가 그 집과의 경계 사이로 넘어간 것 같지 않아서 의아했지만 "우리 집에도 가위가 있다"며 일단 그녀를 안심시키고 돌려보냈다.
생전 처음 가위를 들고 남편은 집 앞의 나무들을 다듬기 시작했다. 우리 정원의 문제가 도대체 무엇인지 가위손에게 조언이라도 얻고 싶은 심정으로 그저 거슬리는 가지들을 싹둑싹둑 잘라냈다. 그런데 저기 대각선 너머로 한참 떨어진 어느 집의 아저씨가 갑자기 집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게 아닌가.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전기톱이었다. 어설픈 우리가 안타까왔는지 "이거 빌려줄까?" 하면서 역시 인심 좋은 웃음을 잊지 않았다. 정원 가꾸기라면 어쩌면 그렇게들 자기 집 일처럼 두 손을 걷어붙이고 나서는지 그 오지랖이 고맙고도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차마 전기톱까지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은 우리는 "노땡큐"와 "아이 캔 두잇"을 외치며 다시 가지치기에 전념했다.
시간이 흘러 지인들에게 얻은 정보와 이곳에서 살아온 경험을 종합해보니, 이곳 사람들은 수시로 집의 안팎을 닦고 다듬으며 내 집 가꾸는데도 정성을 쏟았지만, 하나의 타운으로 형성된 이곳의 주민이 된 이상 마을 분위기를 위하여 각자의 집들을 관리해주는 것이 나름의 ‘예의’라고 했다. 할로윈과 성탄절이 되면 집집마다 창문과 마당을 개성 넘치는 장식들로 꾸미는 것 역시 자신들이 즐기기 위한 이벤트이기도 하지만, 밖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위한 사소하지만 의미 있는 서비스이기도 한 것이다. 서울로 다시 돌아간다면, 다시는 이런 집에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정기적으로 잔디를 깎고 가지 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서울살이와 비교했을 때 불편한 것들을 꼽자면 어디 한두 가지겠는가. 현실에 꼭 필요한 돈. 돈을 사용하기 위해 은행에서 계좌와 카드를 만드는 일도 더블린에서는 느림보 거북이다. 한국에서는 은행에 바로 가서 30분이면 족히 해결되는 일도 예약 잡는데 몇 시간, 날 잡아서 간 후에도 계좌가 만들어지는데 며칠이 걸리다 보니 '빨리빨리'가 생활화되어 있는 한국 사람들은 조급증을 앓기 마련이다.
병원의 예약문화 역시 유럽의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지인들에게 들어보니 더블린과 사정이 비슷했다. 한국에서 보내준 우편물도 이른 아침 8시부터 배달이 되고, 자칫 못 받으면 다시 방문해주는 일은 절대 없다. 무조건 우리가 다시 우체국으로 가서 가져와야 한다. 한국에서 즐겨 이용하던 로켓 배송과 안내문을 붙여놓고 다시 방문해주는 우체국 아저씨가 새삼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주말에는 버스나 루아스의 배차 간격 시간이 더 길고, 간혹 일요일에는 운행을 아예 안 하는 버스도 있어서 당황했던 기억. 그리고 크리스마스 시즌에 대중교통이 거의 운행되지 않아서 집안에서 가족들과 오붓하게 보냈던 일들까지, 이제는 모두 추억이다.
끄집어내자면 불편하다고 꼽을 일이 끝이 없다. 이런 불편함들 때문에 가끔은 아일랜드가 선진국인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하는 젊은 학생들도 종종 보았다. 서울이나 가까운 런던, 파리와 비교해보면 너무 수도스럽지 않은 작고 아담한 더블린의 모습에 실망하는 관광객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크고 빠르고 편하고 신속한 것만이 선진국을 결정짓는 척도는 아니지 않을까. 버스가 늦게 온다고 기사와 언성 높여 싸우기보다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이해하며 넘어가는 모습. 출퇴근길 루아스 안이 너무 붐빌 때면 타인을 밀어붙이지 않고 한걸음 뒤에서 다음 차를 기다리는 배려. 휴일 시즌에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하는 것이 불편하긴 하지만, 버스나 루아스의 운전기사도 어디선가 가족들과 휴가를 보낼 수 있겠구나 하며 이해할 수 있는 아량.
예약을 거치는 것이 답답하기는 하지만 환자를 상대하는 의사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입장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여유가 주어질 수도 있는 셈이다. 저녁 6시부터 슬슬 문을 닫는 상점들과 카페, 마트가 의아하기도 했지만, '그들에게도 저녁이 있는 삶이 필요하겠구나' 생각하면 이해를 못할 일도 아니었다.
예전에 한국에서 내가 당연하게 누리던 편리함과 안락함, 그리고 신속함 이면에는 누군가의 희생과 고통이 알게 모르게 숨어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어떤 때는 소비자로, 어떤 때는 생산자로 살면서 각자 누군가의 삶의 한 조각들을 갉아먹으며 얻은 편리함에 길들여졌던 것은 아닐까.
신영복 님의 '처음처럼'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자동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1m의 코스모스 길은 한 개의 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이 가을을 남김없이 담을 수 있는 아름다운 꽃길이 됩니다.
쉽고 빠른 것들이 주는 혜택은 너무나 많다. 그로 인해 누려온 편안함 역시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내가 편한만큼, 그리고 나 편하자고 상대를 점 하나처럼 쉽고 하찮게, 당연하게 여긴 것은 아니었을까. 가끔은 서울에서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더블린에서 경험하는 낯설고 느린 것들이 때때로 불편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내 인생의 아름다운 꽃길로 남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해보면 더없는 감사로 덧입혀진다. 코스모스 한송이 한송이마저 소중하게 느낄 수 있는 이 가을의 일상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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