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에서 가장 먹고 싶은 한국 음식
흰 종이를 펴고 연필 하나를 꺼내 들었다. 사뭇 긴장감이 감도는 지금, 나는 어느 때보다 진지하다. 이루어질 가능성은 적지만 간절히 바라는 것들의 리스트. 그 우선순위를 정하자니 머리가 아프다. 아주 어릴 적부터의 기억을 시작으로 짧지 않은 삶의 순간 하나하나를 더듬어본다. 꼴깍, 입 안으로 고이는 침을 삼킨다.
나는 지금 '한국에서 가장 먹고 싶은 음식 리스트'를 작성 중이다. 느닷없이 음식에 대한 생각이 맴돌기 시작한 것은 추석의 영향이 크다. 물론 더블린 생활과 추석은 큰 연관이 없지만 이곳에서도 한국의 뉴스를 종종 챙겨보고, 떨어져 있는 가족들과 안부를 주고받다 보니 자연스레 추석 연휴 기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아빠는 십 남매의 장남이었다. 즉 우리 엄마는 십 남매 대가족의 맏며느리였다. 명절, 하면 일단 내 머릿속에는 분업화된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지던 다양한 음식 장만과 릴레이처럼 이어지던 상차림, 그리고 일사불란했던 설거지의 광경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다행히 우리 집은 제사를 지내지는 않았지만 명절 동안 오가는 친척들이 30~40명은 되었다.
할머니가 뒷산에서 거둬온 솔가지를 깨끗하게 매만지기 시작하시면 어느새 추석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엄마가 방앗간에서 잘게 빻은 쌀가루를 가져와 반죽을 만들고 우리 가족은 때가 되었다는 듯 알밤을 깠다. 송편 안에 들어갈 알밤은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성가신 재료 가운데 하나였다. 콩, 깨, 흑설탕까지, 송편 안에 들어갈 것들의 모든 준비가 끝나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송편 빚기를 시작했다.
그 사이 삼촌들 가족이 하나둘씩 집에 도착하고 작은 엄마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본격적인 명절 음식 만들기에 돌입했다. 조금씩 머리가 커지면서 언니와 나도 전 부치기에 투입되곤 했다. 전을 부치는 일은 기름 냄새 범벅에 허리가 아프긴 해도, 간을 본다는 이유로, 혹은 부치다가 망가졌다며 하나둘씩 전을 주워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사이 할머니가 커다란 솥에 하얀 면포와 솔잎을 깔고 송편을 뜨끈하게 쪄내 오시면, 안에 뭐가 들었을까 궁금해하며 너도나도 솔잎향 가득한 송편을 한입씩 베어 물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콩이 싫었는지, 겉으로 거뭇거뭇한 색이 비치는 송편이 보이기라도 하면 손으로 밀어내기 바빴다.
고기를 양념해서 재우고, 잡채에 들어갈 야채들을 다듬고, 사라다(샐러드와 차별화된, 모든 재료가 깍둑썰기로 들어가는 우리식의 샐러드)에 들어갈 과일과 채소들을 자르고, 굴비 비늘을 벗기고, 도라지와 고사리, 시금치나물 삼 형제를 무치고, 그 사이 할머니와 엄마는 도토리가루로 묵을 손수 쑤기도 하시고, 약식이나 식혜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도대체 두 분은 어떻게 이 모든 것을 하셨던 걸까? 진정 나는 원더우먼들과 함께 살았던 걸까?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음식 몇 개만 나열해도 숨이 막혀올 지경이다.
오랜만에 친척들이 모인 명절 당일, 아침상을 물리고 나면 과일과 식혜, 커피가 놓인 다과상이 들어오고, 거품질과 헹구기 2인조로 나눈 설거지가 부엌, 욕실에서 각각 끝나면 다시 점심상 차리기가 시작이다. 특히 이날 오후는 '피크(Peak) 오브 더 피크'다. 저마다의 시댁에서 명절을 보낸 고모들과 아직 남아있는 삼촌 가족이 오버랩되어 신발을 놓을 자리가 없을 만큼 집은 포화상태에 이르고, 각기 다른 시간에 도착하는 고모 가족들에게 시간차를 두고 연이어 늦은 점심상이 차려진다. 돌아보면 엄마에게는 혼이 빠질 만큼 정신이 없는 날이었겠지만, 적어도 내 추억 속에는 가장 흥겨운 명절의 절정으로 남아있다. 아빠를 비롯한 어른들은 현란한 손기술과 요란한 기합소리를 섞어 윷놀이와 고스톱을 즐기셨고, 그렇게 모아진 돈으로 아이들의 선물과 과자를 한 아름 사 오셨다.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우리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동그랗게 모여 앉아서는 돌아가며 한 명씩 노래나 춤 같은 장기자랑을 펼쳤고, 제일 호응이 좋았던 녀석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주어졌다. 시끌벅적하던 그 와중에도 엄마는 과일이며, 전이며 한과와 같은 주전부리들을 끝없이 내오셨다.
한참 동안 잊고 지냈던 그 명절을 떠올리니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몰려온다. 다시 경건한 마음으로 돌아와 먹고 싶은 음식을 고민해본다. 생각해보니 시작은 남편이었다. 작년 봄, 석 달 먼저 더블린으로 떠난 남편이 혼자 지낸 지 두 달 가까이 됐을 무렵 살포시 이런 메시지를 전해준 적이 있다.
한국 가면 먹고 싶은 것 Top 10
1. 아내표 굴 김칫국과 조개 넣은 시금칫국
2. 장모님 표 해물찌개
3. 동화반점 자장면과 짬뽕
4. 평양면옥 냉면
5. 석산정 대구탕
6. 수운회관 김치찌개
7. 신사동 게장과 청국장, 그리고 쌈밥
8. 한우리 국수전골
9. 회 그리고 초밥
10. 뚱땡이집 오징어 김치볶음 쌈밥
세세하게 특정 식당의 이름까지 콕 집어넣은 걸 보니 단시간에 후다닥 써 내려간 목록은 아닌 듯했다. 심혈을 기울여 고민하고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거기에 더해 두 달 뒤 한국에 잠시 들르게 되면 꼭 그 음식들을 먹고야 말겠다는 강한 집념까지 느껴졌다. 고작 한두 달, 그거 못 먹는 게 뭐 힘들다고 난리일까 생각했지만, 막상 3개월 만에 마주한 남편을 보니 짠하기 그지없었다. 6~7kg 정도 살이 빠진 데다가 얼굴은 푸석푸석한 것이, 적지도 않은 나이에 남의 집 셰어 룸에서 지내는 일이 만만치는 않아 보였다. 리스트에서도 볼 수 있듯이 뜨끈하고 얼큰한 국물요리 마니아인 그가 아침은 샌드위치, 저녁은 샐러드로 때웠다는 얘기만 들어도 입이 퍽퍽해지는 듯했다. 그나마 가끔씩 시내의 한국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며 견뎠다는 그는, 한번은 큰 맘먹고 라면을 사다 끓여먹었는데 그날 저녁 집주인이 아무 말 없이 집안 가득 향초를 피우는 것을 보고 다시 먹을 엄두를 못 냈다 했다. 또 하루는 한인마트에서 김치를 사다가 조금 꺼내 먹었는데 남은 것을 어쩔까 고민하다가 겨울이니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 꽁꽁 싸매서 방구석에 놔뒀다고 했다. 얼마 후 그것이 폭발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내 눈 앞에서 김치가 터진 듯 소름이 끼쳤다.
네 식구가 한 집에 함께 모여 한상에 둘러앉아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하고 감사한 일인지를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더블린 생활 1년이 넘어가면서 우리 가족 모두 오동통 살이 오르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이기도 하다.
사실, 요즘이 어떤 세상인가. 세계 어느 곳에 가든지 한국식당과 한인마트를 찾을 수 있고, 부탁만 하면 1주일 이내에 우편으로 고춧가루, 된장, 건나물, 김, 멸치 등등을 한국으로부터 배송받을 수 있다. 뜻과 의지만 있다면 어떻게든 재료를 구해 한국 음식 비슷하게 흉내를 내서 해먹을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 가족은 우물을 파는 심정으로 한동안 한국에서 먹던 음식을 재현하느라 애를 썼다. 작년 추석에는 우리 가족이 가장 먹고 싶은 음식 1위로 뽑힌 짜장면을 만들기 위해 파를 달달 볶아 기름을 낸 후 설탕과 춘장을 더해 한국 중국집에서 파는 짜장면 맛을 내보기도 했다. 볶음밥은 보너스였다. 한국서 친구가 왔을 때는 더블린 마트에서 유일하게 구할 수 조개류인 홍합에 한인마트에서 파는 냉동오징어와 냉동굴을 더해 짬뽕에도 도전해봤다.
갑자기 초코 소라빵이 너무 먹고 싶다는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크로와상의 속을 파내고 누텔라를 녹여 넣은 적도 있고, 집 근처에 있던 태극당의 두툼한 단팥빵이 미치도록 땡기는 날에는 통조림 팥을 졸여 햄버거빵 사이에 넣고는 "이 맛이 아냐, 이 맛이 아냐"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우적우적 먹어댔다. 올여름에는 팥빙수에도 도전해보았다. 기다란 아이스바 얼음틀에 우유를 넣어 얼린 후 강판에 열심히 간다(믹서가 없는 이유로). 여기에 팥과 우유, 아이스크림을 얹어 먹으면 그럭저럭 비슷한 맛을 낼 수 있었다.
더블린에도 초밥집이나 아시안 음식 뷔페집에 있지만 우리 성에는 영 차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아시안 마켓에서 초밥용 문어와 새우를 사 와서 그럴듯한 초밥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서울에 살 때 어디든 나가면 저렴한 가격에 쉽게 사 먹을 수 있었던 김밥도 이곳에서는 별미가 되었다. 일주일에 다섯 번 아이들의 점심 도시락을 싸면서 하루는 빠짐없이 김밥을 만드는 것도 나의 일과 중 하나이다.
그런가 하면 한 달 전에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만두를 빚어 보았다. 그동안은 아시안 마켓에서 종종 냉동만두를 사다 먹었는데 가격 대비 만족감이 너무 낮았다. 한국인 엄마가 가장 얇다고 알려준 중국산 만두피를 사 가지고 와서 두부, 고기, 파, 양파 등 이것저것 야채를 섞어 만두소를 만들었다. 한두 시간 아이들과 만두를 빚다 보니 역시나 어릴 적 생각이 났다. 설날을 앞두고 우리 가족은 할머니가 직접 밀대로 얇게 밀어 만든 만두피를 동그랗게 찍어서 만두를 만들곤 했다. 그때는 한 대야 가득 담겨있던 만두소를 보면서 언제 이걸 다 만드나 걱정했지만 어느새 뱃속으로 냠냠 맛있게 넣었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콩국수를 빼놓을 수 없다. 어릴 적 우리 집은 서울인데도 무거운 맷돌이 있었다. 할머니는 여름마다 콩을 밤새 불린 후 구수하게 삶아서 맷돌 위에 솔솔 뿌려 콩즙을 우려내셨다. 옆에서 지켜보던 우리 삼 남매는 서로 콩을 뿌리고 맷돌을 돌리겠다고 어지간히도 싸웠었다. 그렇게 만든 콩국수는 정말이지 엄청 걸쭉하고 고소했다. 거기에 소금과 설탕을 솔솔 뿌려 먹으면 어린 나도 두 그릇은 거뜬히 비울 수 있었다. 유난히 그 콩국수가 그리웠던 올여름, 이런 내 맘을 알았는지 친한 한국인 엄마가 직접 콩을 갈아 만들었다며 콩국을 싸주었다. 집에 돌아와 면을 삶아 콩국을 얹어 먹으니 어릴 적 그 맛이 살아나는 듯 감회가 새로웠다.
기호와 취향의 차이겠지만, 솔직히 그동안 더블린에서 그다지 맛있게 먹은 음식이 없었다. 아일랜드의 대표 음식은 '피시 앤 칩스'다. 한국식으로 하면 생선가스와 감자칩이다. 더블린 시내에도 다양한 레스토랑과 세계 여러 나라의 요리들을 맛볼 수 있는 식당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비싼 가격만큼 만족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큰 실망은 아일랜드가 섬나라인데도 불구하고 해산물이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물론 한국과 먹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인 이유가 크겠지만, 대부분 구이나 튀김용으로 손질된 생선들이어서 우리가 한국에서 먹던 방식처럼 뜨끈한 탕으로 끓여먹기는 쉽지 않았다.
엄마의 고향은 경상북도 영덕이다. 덕분에 우리는 자라면서 영덕대게를 실컷 먹을 수 있었다. 대게가 아니더라도 꽃게를 비롯한 여러 해산물을 넣어 끓인 엄마의 해물탕은 입맛 까다로운 사위들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만큼 정말 최고였다. 아쉽게도 더블린에서는 '게'를 찾기가 어려웠다. 지난겨울 골웨이(Galway)라는 아일랜드의 서쪽 지역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마침 그곳에서 열린 주말장터에서 가자미와 게를 구할 수 있었다. 기차에 싣고 3시간여 걸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황급히 게 두 마리를 쪄먹었다. 하지만 한국산 게와는 달리 껍질만 두껍고 속살도 그다지 부드럽지 않아서 가족 모두 실망감에 입맛만 쩝쩝 다셨던 기억이 있다.
우리 동네에서 택시를 타고 10분쯤 산으로 올라가면 Johnnie Fox's Pub이라는 1798년에 생긴 오래된 펍이 있다. 한국에서 온 친구가 아이리시 전통 펍에 가고 싶다고 해서 큰 맘먹고 간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30유로 정도를 주고 먹었던 해산물 요리가 아일랜드에서 먹었던 요리 중에 기억나는 음식이라고나 할까. 굴 두 개, 게 앞다리 두 개, 홍합과 조개, 새우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먹을수록 푸짐한 안면도 대하와 조개구이, 영덕 대게가 더욱 간절했다.
추석을 앞두고 한국에 계신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드렸다. 이곳에서 전화를 드릴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명절이 다가올수록 엄마의 목소리는 점점 기운이 없는 듯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어린 손주 녀석들이 보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애써 둘러대셨지만, 엄마도 나처럼 명절이 되면 옛 생각이 새록새록 나시는 것이 분명했다.
시간이 흘러 우리 삼 남매를 비롯한 사촌동생들은 쑥쑥 자라 성인이 되었고, 첫 결혼 테이프를 끊은 언니를 시작으로 줄줄이 저마다의 가정을 이루었다. 그사이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친정아버지도 돌아가시게 되자 명절의 풍경은 점차 달라져갔다. 이제는 큰집인 우리 집에 오기보다는 고모, 삼촌들 가정에서도 그 댁의 며느리, 사위와 모이는 어쩌면 더 자연스러웠다. 이번 추석에도 언니와 형부와 조카들, 그리고 남동생이 엄마를 뵈러 갈 테지만 시끌벅적했던 예년의 명절과 비교해 보면 그 상대적인 허전함을 채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보다 더 한국 음식을 먹어도 배가 고픈 것같은 우리 부부와 아이들. 분명 우리는 먹기 위해 사는 것마냥 필사적으로 잘 먹고 지내는데도 왜 그토록 예전의 음식을 찾는 걸까. 어쩌면 그것은 한국에서의 추억을 복기하는 우리만의 방식이었던 것은 아닐까. 때때로 더블린의 식탁 위에 추억의 음식을 올려놓고 먹고 마시며, 서울에서 함께 갔던 의미 있는 장소를 되새김질하고, 친척들과 모여 나누던 이야기들을 곱씹는 것이 어쩌면 하나의 낙이 되어버린지도 모른다. 음식만 고픈 것이 아니라, 사람이 고프고 추억이 고픈 것, 그것이 타국에서의 삶이라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게 된 것이다.
이제 먹고 싶은 것의 리스트를 적는 일은 그만해야겠다. 이렇게 쓰다 보니 알았다. 내가 그리운 것은 단순히 음식이 아니라, 돌아갈 수 없는 시간과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여전히 남아있는 이 허기는 아무리 추억을 되새기고 복기해도 다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는 할머니의 그 음식들을 맛볼 수 없고, 시끌벅적했던 어린 시절의 명절로 되돌아갈 순 없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기억 속의 음식들을 다시 먹은 듯 포만감에 젖을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내게도, 그립고 고플 때마다 무언가를 꺼내 먹을 수 있는 풍성한 추억의 곳간이 있었음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올해는 충분히 넉넉한 추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