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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콩 Jan 20. 2018

내가 없었을 때도 엄마는 행복했구나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삶을 택할 거야?


낯선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살고 있다 보니 서울에서 지낼 때보다 삶이 많이 단출해졌다.

무엇보다도 인간관계가 심플해져서 만나는 사람, 오가는 곳이 확실히 줄어들고 우리 네 식구끼리 집에 모여 있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이 늘어났다.

처음 더블린에 왔을 때는 아이들의 학교 생활이 아직 시작되기 전이어서 섬이와 콩이는 친구도 없이 하루 종일 둘이서만 놀아야 했다. 서로 기분이 좋을 때는 쿵작쿵작 죽이 잘 맞다가도 조금만 틀어지면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싸워대는 통에 롤러코스터 같은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재미있는 거 보여줄까?"

상황 전환이 필요하다 느껴질 때쯤 나는 아이들의 관심을 끌 무언가를 찾아냈다. 지금은 뜸하지만 오래전부터 해왔던 싸이월드와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등에 남겨놓은 아이들의 흔적이었다. 두 녀석은 자신들도 잊고 있었던 아가 적부터 어린이집 시절의 사진들을 보며 까르르 웃고 폴짝폴짝 뛰며 좋아했다. 마치 숨겨둔 보물상자라도 발견한 것처럼 무척 기뻐했다.


“아웅! 너무 귀엽다! 우는 모습도 예쁘다!”

"이것 봐 우리 둘이 엄청 친했다."


둘이 아장아장 걸으며 어린이집을 오가던 때를 거슬러 올라 둘째 콩이가 태어났을 때 신기해하며 그윽하게 바라보던 섬이의 모습을 우리 가족 모두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나 태어났을 때 오빠가 예뻐했어?"

"그럼 오빠랑 너랑 얼마나 사이가 좋았는데."

"글쎄. 나도 조금 기억이 나는 것도 같고. 흠흠."

자는 콩이를 쓰다듬으며 예뻐하던 사진이 나오자 섬이는 조금 머쓱해하기까지 했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틈만 나면 추억 찾기 놀이에 빠지곤 했다. 이따금씩 무료하거나, 서울의 생활들이 그리워질 때면 사진을 보여달라며 졸라댔다.

며칠 전에도 아가적 모습을 보고 싶다기에 예전처럼 사진첩을 열었다. 역시나 큭큭 거리며 이 모습 저 모습을 펼쳐보더니 더 오래전 사진들이 담긴 폴더들을 찾아냈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콩이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오빠와 엄마 아빠가 셋이 여기저기 다니던 사진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빠랑만 젖소 농장 간 거야? 나는 왜 안 데려갔어?"

" 으응? 저 때 너는 아마 엄마 뱃속에 있었을 거야. 같이 간 거나 마찬가지야."


샘이 유난히 많은 콩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나의 과거를 역추적하듯 옛 사진들을 계속 드래그하며 보고 있었다. 언제 핸드폰을 뺏어야 하나 눈치만 보고 있는데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녀석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눈물샘이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오빠인 섬이도 태어나기 훨씬 전인 엄마와 아빠의 신혼시절, 연애시절, 그리고 나의 결혼 전 모습을 발견한 녀석은 울부짖기 시작했다.


"우리가 없었을 때도 엄마는 이렇게 행복했어? 내가 없는 데도 웃고 있잖아!"


정말 예상치 못했던 반응에 아빠도 나도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엄마도 이렇게 날씬할 때가 있었다거나, 지금보다 예뻤다거나, 하는 칭찬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자신도 없이 엄마가 행복해하는 모습에 저리 속상해할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간혹 아이들이 엄마 아빠 결혼식 사진을 보면서

 "왜 나는 안 데려갔어?"

하는 말도 안 되는 생떼를 부렸다는 귀여운 에피소드는 종종 들은 적이 있지만 녀석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콩이의 눈에 시간에 따라 달라진 나의 겉모습이 아니라, '행복'의 감정이 감지되었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살짝 소름이 끼쳤다. 가끔씩 옛 사진 속 나를 보면서 그때의 기분이나 상황에 대해 미세하게 감정 이입해 본 지도 오래된 것 같은데, 녀석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걸까? 나 조차도 몰랐던 속내를 들킨 것만 같아 괜히 미안해졌다.


지금보다 그때가 더 행복했냐고 묻는다면 물론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그때보다 지금이 더 행복한가?

마치,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와 같은 우매한 물음 앞에서 나는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

모두 희로애락이 뒤범벅된 소중한 나의 삶이기에 둘 중 하나를 택한다는 것은 마치 흐르는 강을 싹둑 잘라 나누는 것처럼 불가능하다.



하지만 출산 전과 출산 이후의 삶은 분명 기원전과 기원 후처럼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출산과 함께 내 인생의 엄청난 2막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그때의 나조차 알지 못했다. 몸과 마음, 생활의 변화라는 단순한 몇 개의 조항으로 비교할 수만은 없다.

기쁨으로도 떨렸지만, 어찌해야 할지 모를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도 얼마나 떨었던가. 아이의 밤낮 없는 울음에도 잠을 설쳤지만, 새 생명이 옆에 있다는 사실이 신비롭고 경이로워서 쉬이 잠 못 드는 밤도 많았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 육아가 너무 힘들어서 울기도 했지만, 아이들이 선사해준 예상치 못한 기쁨과 감격에 울컥한 적도 많다.

나의 좁은 생각으로 계획하고 실행했다면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그 많은 일들을 좋고 나쁘고, 힘들고 말고라는 단 몇 마디로 설명하기란 너무 어렵다.




가부장적인 대가족 속에서 그저 내 한 몸 스스로 앞가림만 겨우 하면서 자라온 이기적인 내가, 내 몸보다 다른 몸을 더 챙기고 신경 쓰는 일은 솔직히 쉽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보채는 아가를 달래고 먹이고 재울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모성애보다는 막중한 책임감이었다고 감히 고백하고프다. 언제부터 내 생활의 모든 우선순위가 아이 위주로 재배열되어 가는지도 모르게, 그렇게 가랑비에 옷 젖듯 하루하루 아이와 나의 삶이 점점 피부처럼 찰싹 붙어가면서 어느새 시간이 이만큼 흘러버렸다.


분명 스스로 택했고, 씩씩하게 걸어온 지금까지의 나날들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나도 모를 답답함이 치밀어 아이들에게 된통 퍼부울 때도 있다. "나 이거 먹기 싫어" 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내 밥그릇에 자기 음식을 올려놓거나, 엄마가 화장실에 있는 그 순간도 못 기다리고 문을 두드리며 뭔가를 요구하고 불쑥 문을 열 때, 혼자 있을 시간과 공간을 겨우 찾아 음악을 듣거나 영화나 책을 보려고 앉아 있으면 어느샌가 옆에 바짝 붙어서 "나도 듣고 싶은 거 있는데 틀어줘!" 하며 졸라 댈 때면 깊은 한숨이 나오곤 한다.

이따금씩 아이들은 엄마도 엄마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는다. 본인들의 삶과 엄마의 삶의 영역을 나누는 구분선이 명확하지 않기에, 침범한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자유롭게 선을 넘나드는 것이다. 어쩌면 일찍부터 독립된 엄마의 존재를 각인시켜주지 못한 내 탓은 아닐까 자책도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새삼 나만의 영역을 되찾고 싶은 욕구는 자꾸만 커지고 있다.


“네가 먹기 싫은 건, 엄마도 싫을 수 있는 거야.”

“지금은 엄마만의 시간이야. 방해하지 말아 줘.”


섬이와 콩이도 이젠 그 정도는 알아야 할 나이가 되었다는 생각에 가끔은 정색하며 모진 말을 건넬 때면 녀석들은 더없이 서운해하며 입을 삐죽거리기 일쑤다.




2016년 6월. 우리 네 식구가 더블린으로 날아오기 불과 며칠 전, 때마침 친정 엄마의 칠순 생신이었다. 친정 아빠도 안 계신데 5년 정도는 엄마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마음이 아쉬워 우리 삼 남매는 가까운 친척분들과 지인들을 모시고 축하의 자리를 마련했다.

머리를 모아 이것저것 준비하면서 엄마에게 좋은 선물이 뭘까 고민하던 끝에 내가 직접 엄마의 인생 비디오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엄마, 옛날 앨범 좀 꺼내봐요."

친정에 간 김에 나는 엄마와 함께 우리 가족의 옛 앨범 들을 뒤적이며 시간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맘에 드는 사진을 한 장, 한 장 모아서 집으로 슬쩍 가져왔다.

호기롭게 들고 오기는 했지만, 막상 앞에 놓인 사진 한 뭉텅이를 보니 무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한동안 사진을 뒤적거리다가 나보다도 한참 어린, 이제 막 피어나는 아리따운 소녀의 사진 한 장에 시선이 멈추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그 소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엄마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죠.

우리보다 더 젊고 예뻤던 때”

무언가에 이끌리듯 첫 사진 안에 이렇게 글귀를 집어넣고는 시간 순서대로 엄마의 삶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스물다섯에 아빠와 결혼하고, 이듬해에 언니를 낳고, 이후 3년마다 나와 동생을 낳으면서 조금씩 중년 여성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엄마와 마주했다.

3년마다 있었던 우리들의 입학과 졸업이 연이어 지나가고, 그사이 일어난 아빠의 병환, 친할머니와의 이별 등 크고 작은 일들이 다시금 아프게 되살아났다. 그리고 언니와 나의 결혼과 출산에 이르기까지 숱한 사건 속에서도 엄마는 늘 든든히 자리를 지키며 우리 곁에 있었다.


5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그 파란만장한 삶을 담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나는 자꾸만 웃고 있는 엄마를 찾고 있었다. 아빠와 떠난 신혼여행지에서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는 앳된 얼굴이라던지, 친구들과 떠난 여행지에서 홀가분하게 바람을 즐기고 있는 모습, 손주들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으시는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나도 모르게 위안을 얻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엄마의 그 굴곡진 삶을 다 알면서도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도, 또 태어난 후에도 변함없이 행복했다는 흔적을 콩이처럼 절실히 찾고 싶었던 것이다.


"다시 태어나도 아빠랑 결혼할 거야?"

TV 속에서 연예인들이 식상하게 주고받는 질문을 보며 아이들이 내게 또 묻는다.

“그럼! 꼭 아빠를 다시 만나서 결혼해야지. 그래서 너희들도 꼭 낳고!”

언제나처럼 정답은 정해져 있다. 그리고 솔직한 내 마음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은 삐딱선을 타본다.

“아니, 엄마는 만일 다시 또 인생이 주어진다면 이번에는 결혼 안 하고 혼자 살면서 열심히 하고 싶은 일도 하고 혼자 여행도 다녀보고 싶어!”

순간, 아이들의 표정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이내 섬이가 애써 덤덤하게 말한다.

“에이 맞아. 엄마도 하고 싶은 거 해봐야지.”


그렇다면 나도 용기를 내어 차마 내 엄마에게는 물어볼 자신이 없던 질문을 상상 속에서 건네본다.

“엄마, 다시 태어나도 아빠랑 결혼해서 우리를 낳을 건가요?”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쉬이 짐작이 되진 않지만, 그 어떤 대답이라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 어떤 삶을 택한다 해도 나는 엄마를 지지할 거예요. 이번 생에서는 이미 당신의 딸로 충분히 행복했으니까요.”


내 엄마에게 드리고 싶은 말, 그리고 이다음에 내 딸에게도 듣고 싶은 이 말을 가만히 되내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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