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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콩 Sep 17. 2018

외롭고 고단한 엄마를 왜 나는 혼자 걷게 했을까

'가족'이라는 향수병



“엄마와 언니가 한국으로 돌아가서 많이 슬프지?”

오랜만에 만나는 더블린의 친구들은 모두들 비슷한 안부를 묻는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햇살이 더욱 뜨거웠던 아일랜드의 7월. 엄마와 언니, 조카들과 2년 만의 눈물겨운 해후를 가졌고 또 2주 후 뜨거운 이별을 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가 싶게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들이 스르륵 빠져나간 것 같은 허전함에 취해있다 보니 어느새 가을이 오고 있었다. 등교하는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알싸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며 나도 마치 새 학기를 맞이한 것처럼 씩씩하게 걸어보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을 다잡기가 쉽지 않다. 아이들을 스쿨버스에 태워 보낸 후 터벅터벅 집 앞으로 걸어올 때마다 문득문득 택시 안에서 손을 흔들며 더블린 공항으로 떠나던 엄마와 언니, 조카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날 눈 앞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택시를 바라보며 딸아이와 한동안 집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어느새 조금씩 흐르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아이를 끌고 들어와 작정한 듯 둘이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마지막으로 엄마와 포옹을 하면서도 참고 참아왔는데, 지난 몇 달 사이 왔던 친구들과 가족들을 다 보내고 난 후에야 그렇게 울음이 터져버렸다.

공항으로 떠나는 택시 안에 몸을 싣고 손을 흔들던 언니와 엄마


"가족들이 많이 보고 싶지 않아?"

더블린에서 적응하느라 한창 바빴던 처음 몇 달은 이 질문을 들어도 괜찮다며 웃곤 했다. 가족들이 그립긴 했지만 새로운 곳에서의 낯선 생활이 신기하고 얼떨떨해서 그리움에 빠져있을 여유가 없었다. 모든 것을 리셋해야 하는 과정에 온통 정신과 에너지를 쏟아야만 했다. 가끔씩 숨 돌릴 틈이 오면 눈 앞에 펼쳐진 푸른 하늘과 커다란 구름, 짙은 초록빛의 벌판과 나무들에 종종 시선을 빼앗겼다. 그렇게 떠나온 곳보다는 새롭게 주어지는 것들에 마음을 주느라 내가 살던 고향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조금씩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자기 방어였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한동안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고 보고 싶어도 쉽지 않으니 너무 먼 곳에 마음을 두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하는 것이 잘 버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더블린에서 두 번의 겨울을 보내면서 단단했던 마음이 조금씩 물러지고 있었다. 함께 보낼 수 없는 추석과 설날, 서로의 생일들이 자꾸 늘어나면서 갈수록 쓸쓸해지는 엄마의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하하 웃으며 함께 만들고 호호 불며 맛있게 먹었던 뜨끈한 명절 음식들이 점점 그립고, 따뜻한 방에서 한 이불을 덮고 친척들과 도란도란 나누던 얘기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이런 내 마음을 알고 일부러 머나먼 더블린으로 찾아온 친구들과 가족들 덕분에 올해는 묵혀뒀던 그리움을 풀고 또 풀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들 다시 떠나고 나니 오히려 더 허탈해졌다. 보고 나니 더 보고 싶다는 노래 가사 같은 그 말이 절실히 와 닿았다. 아주 긴 시간 생사도 모른 채 떨어져 살다가 단 며칠 만난 후 기약도 없이 다시 헤어지는 이산가족의 아픔에 비할까마는,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1분 1초가 아깝기만 했을 그들의 마음을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Homesick"

더블린에 온 후 이 단어를 사용할 일은 없을 거라 자신했는데, 누군가 ”How are you?”하고 인사를 건넬 때마다 자꾸 이 대답이 입안을 맴돈다. 보고 싶던 사람들을 정신없이 만나고 떠나보낸 후 자꾸만 몸과 마음이 처지는 내 상태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고민하다 보면 어느새 저 단어에 가닿아 있다. 그럴 때면 가족들과 함께 찍었던 사진을 다시 들춰보며 허전함을 달래려 애쓴다.

요즘 들어 자주 꺼내보는 사진은 독일 여행 중 어느 숲 속의 산책로를 나란히 걷는 엄마와 나의 모습이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남편이 멀찌감치서 찍어준 그 사진 속에서 엄마와 나는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키가 큰 나무들 사이를 호젓하게 걷고 있다. 살면서 저렇게 엄마와 나란히 걸어본 적이 있었나, 떠오르는 추억이 많지 않아서인지 사진 속의 그 모습이 더욱 낯설면서도 귀하기만 하다.


내 어린 기억 속 엄마는 언제나 바쁜 분이셨다. 엄마의 손은 우리 삼 남매의 손을 잡고 있는 시간보다 다른 무언가를 하느라 분주한 때가 더 많았다. 흔히들 '손재주가 많으면 고생한다'고들 하는데,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가 생각났다. 십 남매의 맏며느리라는 타이틀만으로도 집안의 대소사를 주무르던 큰손의 포스를 짐작할 수 있듯이 엄마는 살면서 단 하루, 한 순간도 허투루 시간을 보낸 적이 없다.

어릴 적의 엄마는 미용실에서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하루 종일 누군가의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숍을 정리하고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한 후에도 뜨개질로 쉴 새 없이 가족들의 겨울 옷을 짜내는가 하면, 재봉틀로 커튼이며, 식탁보와 침대보, 옷까지 손수 만들었다. 어느새 동네에 소문이 났는지 천을 사들고 와서 이것저것 부탁하는 이웃들까지 늘어나서 오히려 집안일보다 부업으로 더 바쁠 지경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동네 어르신들에게 틈틈이 파마도 해드리고 머리도 잘라드리는 것을 쉬지 않았다. 아빠가 편찮으시면서 온전히 아빠의 간병에 매달리게 되었지만 병실에서도 늘 뜨개질바늘과 실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시간이 날 때면 주변 환자들이나 가족들의 머리를 다듬어주기도 했다.

결혼과 출산 후 가끔씩 아이들과 친정을 찾아가도 오히려 엄마가 더 바빠서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다. 교회 꽃꽂이며, 치매에 걸리신 교회 어르신 댁 방문 등의 스케줄로 엄마의 일상은 꽉 짜여있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사랑 가득한 눈으로 손주들을 바라보면서도 손은 교회 분들과 함께 드실 음식들을 준비하고, 주변의 누군가에게 입힐 옷을 만들고 있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조금 한숨을 돌릴까 싶어, "엄마 내가 설거지할게. 잠시만 놔둬요!" 해도 그릇들이 개수대에 쌓여있는 모양이 마땅찮으셔서 "이까짓 게 뭐라고 두냐 얼렁 해치우는 게 낫지"하며 또 말릴 틈 없이 팔을 걷어붙이시는 엄마였다.

그렇게 그녀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나누고 해 주느라 정작 자기 몸이 닳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결국 문제는 터지고 말았다. 더블린으로 오기 몇 달 전 엄마는 갑자기 무릎의 인대가 파열되어 수술을 받아야 했다. 다행히 매우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연세가 있으셔서 수술을 하신 후에 바로 뛰고 걸을 수 있을 만큼 회복이 빠르지는 않을 거라는 의사의 얘기에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우리 가족이나, 함께 여행을 준비하는 언니나 모두 마음이 무거웠다. 당신 때문에 괜히 우리들이 불편할까 봐 비행기표를 취소하는 게 어떻냐는 엄마에게 나는 단호히 말했다.

"엄마, 그냥 와서 가만히 앉아 우리 얼굴만 보고 가도 돼요. 공기 좋은 데서 쉬다만 가셔도 되니까, 그런 말씀 마시고 무조건 오세요!"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더블린까지 날아와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엄마의 짐가방에는 그동안 손주들을 위해 떠 놓은 조끼와 스웨터, 목도리, 모자가 가득했고, 또 한 꾸러미에는 파마약과 도구, 가위와 이발기 등 머리를 손질해줄 도구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2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때문에 시차적응이 쉽지 않을 텐데도 새벽같이 일어나 우리 집 바닥을 쓸고 아침 쌀을 씻어 밥통에 앉혀놓고 무얼 먹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이것저것 맛있는 음식을 해드려야지, 다짐했던 것과는 달리 마치 나는 친정에 온 것처럼 엄마가 싸온 한국 반찬들과 엄마가 해주는 음식들로 그동안의 밀린 허기를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우리 가족은 나란히 의자에 앉아 엄마에게 머리를 맡겼다. 2주라는 짧은 시간 동안 엄마의 손은 여전히 두 개로는 부족할 만큼 바빴다.

더블린까지 와서 내 머리를 잘라 준 엄마
엄마가 손수 떠주신 아이들의 스웨터와 한복, 그리고 모자들


큰 맘먹고 유럽에 왔는데 아일랜드에만 머물다 가는 게 아쉬워서 나와 남편은 독일 뮌헨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지역으로 일찌감치 가족 여행 계획을 짜 놓았지만 문제는 엄마의 무릎이었다. 하지만 행여 우리가 걱정할세라 전보다 많이 좋아졌다며 의욕을 보이는 엄마를 믿고 남녀노소 여덟 명이 함께하는 엿새 동안의 가족 여행을 시작했다. 혹시 무릎의 무리가 가지 않을까 싶어 기차, 버스, 마차, 트램, 택시까지 모든 교통수단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도 해 놓았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호기심으로 가득한 엄마는 우리와 여행을 온 것만으로도 기뻐서 어린아이처럼 이곳저곳을 즐겁게 걸으셨고 선물가게마다 들르며 누군가에게 전해줄 기념품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의 일정의 마치고 숙소로 들어오던 길에 엄마는 잠깐 긴장이 풀렸던지 발을 살짝 헛디디고 말았다. 어느새 부어오르는 발에 파스를 붙이고 찜질을 하며 여행 일정을 어떻게 조율해야 할까 고민했는데, 다음날이 되자 또 괜찮아졌다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걱정이 쉬이 가시지 않은 우리는 어딘가를 걸을 때마다 의식적으로 엄마와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으며 부축했지만 엄마는 정말 괜찮아진 듯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엄마와 계속 나란히 걷다가도 이따금씩 그런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엄마와 오붓하게 여행을 다녀온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했지만, 어릴 적부터 언니나 나는 엄마와 몸을 기대고 함께 길을 걷거나 살갑게 부비며 놀아본 기억이 많지 않았다. 늘 생업 전선에서 몸을 부대끼며 사느라 우리들과 그러고 싶어도 여력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런 옛일들이 아쉬워 어색하더라도 더욱 엄마와 붙어 다니고 싶었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함께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시간이 적어도 3년은 지나야 주어진다고 생각하니 하루하루가 짧고 마음이 급해졌다.

 



중3 때였던가. 고등학교 진학 문제로 담임 선생님과 상담이 있었던 날, 엄마는 유난히 부스스한 모습으로 학교에 찾아왔다. 아빠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지 몇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는데, 그 사이 아빠의 수술이며 병간호로 지칠 대로 지친 중에도 일부러 짬을 내어 학교에 오셨다. 그런 엄마가 짠하고 고마워서라도 더 살갑게 맞았어야 했는데 철없던 나는 선생님과 엄마 앞에서 냉랭한 기운만 내뿜고 있었다. 갑자기 기울어진 집안 상황 때문에 너무 힘들었던 엄마는 예전과 달리 내가 대학에 진학하기보다는 졸업 후 바로 취직을 할 수 있는 고등학교로 가기를 원하셨고 나는 한사코 그럴 수 없다며 버티고 있었다. 중간에서 난감해하던 선생님이 겨우 엄마를 설득해서 인문고 진학으로 마무리를 지었지만, 상담이 끝나고도 우리 모녀는 여전히 마음을 좁히지 못했다. 어린 마음에 어찌나 엄마가 원망스러웠던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엄마의 곁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는 느릿느릿 그 뒤를 따라갔다. 왜 안 오나 걱정이 되어 이따금씩 뒤돌아 나를 찾는 엄마의 시선을 외면한 채 긴 시간을 천천히 혼자서 걸었다.


여행지에서 엄마와 팔짱을 끼고 걸을 때마다 이상하게도 오래전 그 순간이 자꾸만 떠올랐다. 병원에서 지내느라 제멋대로 헝클어진 머리에 축 처진 어깨로 걸어가던 엄마의 뒷모습도 눈에 아른거렸다. 갑자기 가장이 된 그녀의 어깨는 그 모든 짐을 짊어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넓지 않았다. 그때의 엄마는 고작 지금의 내 나이였던 것이다. 내가 옛날의 엄마였다면 앞이 보이지 않는 그 순간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었을까.

외롭고 고단한 그때의 엄마를 왜 나는 혼자 걷게 했을까. 왜 그 손을 잡아드리지 못했을까.


후회해봐야 소용없는 그 순간을, 엄마와 걸으면서도 머릿속으로 자꾸만 되감기 하고 있었다. 그 찰나가 이리 아프게 오래 남을 줄 았았다면 매 순간 엄마에게 좀 더 따뜻한 딸이 되어드릴 걸. 엄마에게는 얼마나 많은 찰나의 상처가 흉터로 남아있을까. 내가 했던 크고 작은 말과 행동들을 떠올리다 보니 그것들이 다시 화살이 되어 내게 날아오는 것만 같아 몸이 떨려왔다. 그럼에도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엄마의 손을 맞잡고 걷는 것뿐이었다. 그나마도 2주라는 제한된 시간 동안만 허락된 일이었다.


엄마와 언니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며칠 후, 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엄마 발목이 계속 낫지 않아 병원에 갔는데, 글쎄 의사가 골절되어서 깁스해야 한다고 했대."

너무 놀라 직접 전화를 하니, 행여 멀리서 걱정할까 싶어 유난히 밝은 목소리로 답하시는 엄마다.

"참 신기하지 뭐니. 너희랑 여행 다닐 때는 정말 별로 안 아팠거든. 그런데 병원에 가보니 부러졌다네. 며칠 조심하면 금세 나을 테니 걱정 안 해도 돼."


엄마는 정말 안 아팠을까. 어쩌면 진심일지도 모른다. 언제 또 우리들과 멋진 여행지를 걸을 수 있을까 싶어 기쁘고 들뜬 기운이 그 통증을 달래고 마음을 다독였으리라. 언니와 나보다도 우리가 함께 걸었던 그 순간을 더 귀하게 누리고 만끽했으리라. 주름처럼 차곡차곡 삶의 여러 날을 더해온 만큼 엄마는 우리가 함께하는 그 시간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절실히 알고 있었다.


유난히 더웠던 8월의 한국. 두꺼운 깁스 때문에 다리에 온통 빨갛게 피부발진이 번졌다면서도 엄마는 여전히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온다.

"뒷마당에 분홍 꽃이 활짝 폈어요. 엄마가 저걸 보고 갔으면 좋았을 걸."

아쉬워하는 나를 엄마는 다독였다.

"너무 예쁘겠다! 어쩐지 그때 꽃봉오리가 맺혀 있었던 것 같았어. 꽃이 시들고 나면 꽃가위로 시든 꽃대를 잘라줘야 다음에 더 예쁜 꽃이 핀단다. 지난번에 콩이랑 손으로 몇 개 자르다 말았는데..."

다음 해가 되어도 엄마는 그 꽃을 볼 수 없는데, 마치 직접 보고 있는 것처럼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가끔씩 서로 통화를 하면 이제 엄마가 더 신나게 얘기를 이어가신다.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에 오가는 동네 길목이나 루아스를 타고 지나는 더블린 시내 길. 그리고 집안 곳곳을 다니는 내 모습이 마치 훤히 보이는 듯, 이제 자신이 우리 모습을 보고 왔으니 안심이 된다는 듯 지구 반대편에서 고개를 끄덕끄덕하신다.


어미 거미와 새끼 거미를

몇 킬로미터쯤 떨어뜨려 놓고
새끼를 건드리면 움찔
어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킨다는 이야기,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내게도 있어
수천 킬로 밖까지 무선으로 이어져 있어
한밤에 전화가 왔다
어디 아픈 데는 없냐고,
꿈자리까지 뒤숭숭하니 매사에 조신하며 살라고
지구를 반 바퀴 돌고 와서도 끊어지지 않고 끈끈한 줄 하나


                                        손택수 시인의 ‘거미줄’


TV의 한 프로그램에서 읽어주는 이 시를 들으며 마음이 움찔했다. 어미 거미를 건드리면 새끼 거미도 어미처럼 움찔하려나, 아마 아닐 것이다. 아닌 줄 알면서도 "괜찮다, 괜찮아"하는 어미의 거짓말에 짐짓 속아주는 새끼 거미는 그렇게 어미의 안위보다 내 맘의 안위를 더 생각하는 때가 더 많다. 엄마를 따라가는 내 걸음은 여전히 그때처럼 느릿느릿 뒤처져 있기만 하다.

아침마다 두 아이의 손을 잡고 걸으며 그래도 속으로 기도하곤 한다. 우리 중 누군가 뒤쳐지더라도 절대 서로의 손을 놓지  않기를.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더라도 아이들이 이 순간을 기억해 주기를. 내가 놓았던 엄마의 손을 기억하는 것처럼.


지금은 비록 지구 반대편으로 다시 헤어졌지만 끈끈한 줄로 이어져 있으니 따로 또 같이 각자의 길을 씩씩하게 걷고 있다 보면 엄마와 또다시 만나 걸을 날이 올 것이다.

그런 찰나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후회 없이 꽉 잡아야겠다. 지금보다 야위어져 있을 엄마의 그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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