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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콩 Jan 04. 2020

화가 나서 화를 내는 건데 왜 화가 났냐고 물으시면..

새해에는 ’火’를 잘 다스리고 싶다

저녁을 먹기 시작할 즈음 남편과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돌연 마음이 상했다. 평소 같으면 그냥 ’으이구’하며 서로 푸념하다가 넘어갔을 사소한 얘기였는데 이상하게도 부아가 치밀었다. 식사를 막 시작한 중이라 아이들 앞에서 화를 낼 수는 없고, 그냥 그릇만 들여다보며 느릿느릿 식사를 이어갔다.

혼자 생각에 빠지다 보니 이미 마음이 상했다고 단정해버린 요상한 고집이 점점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도 이런저런 얘기 때문에 서운했지만 겨우 참았는데, 또 별 것 아닌 것으로 속상하게 하다니, 내가 화날 만도 하지 않겠어?’

아이들이 엄마! 엄마! 부르는 소리도 유치하게 못 듣는 척하며 속으로 북도 치고 장구도 치며 혼밥 하는 사람처럼 꾸역꾸역 음식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대강 식사가 끝나고 눈치 보던 아이들도 자리를 뜨자 남편이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당신  화가  거야?”

순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다그쳤다.

”화를 낸 게 아니라 화를 안 내려고 참고 있는 거잖아!”

남편은 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지금은 안 되겠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


내가 왜 화가 났는지 모르거나 화를 낼만한 이유가 아닌 것에 토라졌다고 여기는 그에게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이 구차해진 나는 남은 응어리를 마음속 독백으로 이어가기 시작했다. 화가 날 수밖에 없었고, 화를 내도 정당한 이유, 누가 들어도 논리적으로 납득할 이유를 찾아야만 했다.

남편의 말이 그렇게 심했나? 그가 진짜 나를 화나게 하려고 그 말을 했던 걸까? 솔직히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깊이 들어가 보면 그가 건드린 것은 내가 유독 예민한 어느 부분의 털끝이었는데, 평소에 언급한 적이 없으니 실은 그것을 건드렸다는 사실조차 그는 모를 것이다.

오늘따라 그 털끝이 파르르 곤두섰던 이유는 일주일째 낫지 않는 심한 감기로 체력도 정신력도 바닥이 난 내 상태가 가장 큰 몫을 했다. 실은 그래서 남편이 내 대신 저녁식사도 준비했던 건데, 밥 먹으라는 소리에 주방으로 나가보니 평소 신던 슬리퍼가 마침 보이지 않았고, 슬리퍼를 찾아 거실에 가보니 아이들이 어질러놓은 바닥이 눈에 들어왔고, 아픈 몸으로 소파를 이리저리 밀며 밑에 깔린 슬리퍼를 찾고 보니 그 사이에 녀석들이 먹고 버린 과자며 사탕 껍질들이 그득했다. 그것들을 치우고 청소기를 돌리고 씩씩거리며 식탁에 앉았을 때, 이미 나는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 그 자체였다.

앞으로 또 저런 쓰레기를 보게 된다면 향후 도시락에 넣을 간식을 하나씩 빼겠다는 협박(?)을 아이들에게 최대한 덤덤하게 통보하자, 뭐 낀 놈이 성낸다고, 녀석들은 오히려 왜 둘 다 똑같이 간식을 빼냐고 항의하기 시작했고, 누가 먹었든 눈에 보이면 같이 치우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딸아이에게 그럼 엄마도 내 옷만 빨고, 내 방만 치우겠다는 유치한 폭언을 날리자, 그건 엄마가 당연히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아이는 당당하게 되물었다. 그래, 이제 폭발해도 될 만한 시점이 도래했구나, 하는 그 순간 눈치 없이(?) 내게 뭔가 얘기를 건넨 남편은 이유도 모른 채 이미 팡 터져버린 폭탄의 투명 파편을 뒤집어쓰고 말았고, 결국 소화불량은 그의 몫이 되었다.


설거지를 하며 홀로 독백을 끝내고 나니, 남편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사실, 진짜 내가 화가 난 이유와 대상을 딱히 무엇, 누구라고 정의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는 지금도 아내가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어 머릿속으로 도리질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밥 먹다가 입을 다물어버린 내 잘못인가? 나는 큰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그나마도 참는다고 참은 건데, 속에서 일어나는 ’화’라는 감정을 내가 미리부터 막을 수는 없는 거잖아?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의 여러 감정들

잠시 인터미션이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흥분한 나는 내면의 독백 연기 2막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화를 내도 되는 정당하고도 논리적인 이유가 완벽할 때만 화를 낼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분노’라는 감정은 기쁨이나 슬픔처럼 내 속에서 반응하듯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건데 갑작스레 번지는 그 불길을 매번 어떻게 논리라는 방화벽으로 차단할 수 있느냔 말이야. 물론, 오늘처럼 불을 내뿜는 대신 속으로 연기를 피우는 방법도 있겠지만, 아무리 감춘다고 해도 이미 상한 기분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내색 안 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고.

다시 도돌이표를 찍고 돌아가, 이번에는 남편이 물었던

”당신 왜 화가 난 거야?”라는 말에 꽂힌 나는 어느새 그 말을 “당신이 화가 날 만한 이유가 있었어?”라는 살짝 비틀린 버전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사실, 그 부분에서 더욱 속이 상했던 건 사실이다.

“나 때문에 뭔가 마음 상한 거야?”

“당신 몸이 안 좋아서 많이 힘든 것 같네.”

이런 식으로 물어봐줬더라면 이유도 모른 채 타올랐던 내 분노가 조금은 잔잔해졌을 텐데, 화가 났다는 그 상황 자체를 납득하지 못하는 그의 반응에 쌓였던 서운함이 터져버린 것이다. 다시 화살을 남편에게 돌려 속으로 훌쩍훌쩍거리다 보니, 문득 이런 상황이 데자뷔가 아닌가 싶었다.


도대체  화를 내는 거야?”

그게 화낸다고 해결되니?”

무엇 때문에 화가  건지 말로 얘기를 해야 알지.”

아이들이 씩씩거리며 화를 낼 때마다 내가 던지곤 했던 멘트들이 어디선가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얼마나 겨울왕국처럼 차가운 엄마였는지 절절하게 느껴져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늘 그랬던 건 아니지만, 내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아이들이 화부터 내기 시작하면 함께 신경이 곤두서서 고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저런, 우리 섬이가 기분이 많이 안 좋구나.”

“누가 우리 콩이를 이렇게 속상하게 했을까?”

엄마인 나라도 한풀 꺾고, 부드러운 말로만 시작했더라도 좀 더 쉽게 맘이 풀렸을 거라는 사실을, 남편에게 비슷한 뉘앙스의 멘트를 돌려받고 나서야 깨닫는 나였다. 화가 난 진짜 이유는, 맘을 흠뻑 안아주고 난 후에 찬찬히 되짚어도 될 것이었다. 역추적하듯 하나하나 원인을 찾아가다 보면, 아이들 역시 미처 몰랐던 자신의 컨디션을 돌아볼 수 있고, 생각보다 분노의 원인이 참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기 시작하면서 내 안에 이토록 많은 짜증과 화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에 참 많이도 놀랐다. 풀어도 풀어도 끝이 없는 콧물처럼, 참아도 자꾸만 터져 나오는 재채기처럼, 사회생활을 하거나 친구들과 지낼 때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던 내 모습이 아이들 앞에서 튀어나올 때마다 가장 많이 당황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언젠가 소아정신과 의사인 서천석 씨가 분노에 관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분노가 타오르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연료와 불씨. 분노의 연료는 스트레스다. 고통이다. 힘든 상황은 분노가 타오를 수 있는 연료다. 특히 나의 소중한 것을 빼앗긴 고통이 가장 좋은 연료다. 소중한 것은 여러 가지다. 물건도 될 수 있지만 사람도 가능하다. 시간을 빼앗기거나 내 영역을 빼앗긴 것, 나의 위신과 자존감에 손상을 입었을 때도 분노는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분노의 불씨는 무엇일까? 분노의 불씨는 판단이다. 상대로 인해 내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상대가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 괴롭지 않을 텐데. 저 사람이 그렇게 행동해서 내가 괴로운 거야. 저 사람 때문이야. 나는 피해자이고, 저 사람이 가해자라는 생각이 분노에 불을 붙인다.

서천석 <아이가 나를 화나게 할 때> 칼럼 일부


우리에게 일어나는 ’화’를 불씨에 비유한 그는 불이 나는 이유가 연료와 불씨에 있다고 말하면서, 그 재료와 불씨를 잘 감추고 관리하는 일만 잘해도 화를 줄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이번에도 그랬다. 나의 엉망인 컨디션과 스트레스가 충분한 연료가 되었고, 이런 나를 가족들이 제대로 도와주지 않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불씨가 되어 점점 옮겨 붙기 시작했다.

화를 줄이기 위해 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솔직히 한 살 한 살 나이를 보탤수록 체력은 떨어지는데, 아이들은 덩치도 마음도 점점 커져간다. 몸으로나 말로나 쉽게 물러서지 않는, 게다가 차례차례 사춘기의 터널로 들어서는 두 녀석을 상대하는 일은 하루하루가 버겁다.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나 자신도 싫고, 그 얘기를 잔소리로 치부하고 외면하는 녀석들도 가끔은 밉살맞다. 그래도 방관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목소리가 커져버리면, 결국 남는 것은 피해의식과 죄책감이다. 두 아이의 양육을 책임져야 하는 엄마라는 부담스러운 상황과 때때로 내 말을 존중하지 않는 아이들이 이렇게 나를 성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피해의식에 젖게 되고, 그래도 어른인 내가 참고 더 지혜로웠어야 했다는 죄책감이 묘하게 얽혀 앙금으로 남는다.


그 앙금들이 차곡차곡 연료로 쌓이고 불씨를 활활 타오르게 할 나뭇가지들이 되어 하나씩 옆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크게 화를 내도 실상 뚜렷하게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매번 경험하면서도 나는 왜 같은 일을 반복하는 걸까? 이따금씩 내게 습관처럼 화를 내는 아이들을 들여다보니 그 이유가 보였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멀쩡하다가도 엄마가 나타나면 투정도 많아지고 짜증도 부리곤 했던 것은 ’나를 바라봐달라’는 일종의 신호였던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엄마는 내 맘을 좀 알아달라는 간곡한 의사표시 같은 것이었다.

나 역시도 다르지 않았다. 내 속의 ’버럭이’는 틈만 나면 내 얘기를 좀 들어달라고 소리쳤다.

나 힘들어!

나도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다들 나한테만 다 해달라고 하지 좀 마!

나도 원래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고!

속 안에서 늘 부글부글 끓고 있던 이런 생각들이 기회만 되면 불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가 가끔씩 장렬하게 타올랐다. 그 분노의 불길이 휩쓸고 간 후에는 쓸쓸함만이 남곤 했다.

’다시는 이러고 싶지 않아, 다음엔 참아야지’

이런저런 말로 스스로를 위로해도 기분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말은 산불예방에만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다 타버린 잿더미를 쓸어 담으며 자기 연민에만 빠져있던 내가 되새겨야 할 표어였다.

오늘 나는 왜 컨디션이 안 좋았지, 아이들이 내게 그렇게 했던 이유는 뭐였을까,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고 힘들게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 아닌데, 단지 이렇게 서로 화를 낼 때까지 각자의 속에 쌓여있던 불씨를 들여다봐주지 못했던 게 아닐까.

왜 불이 났는지,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 주변을 정리하고 돌아봐야 했다.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의 상태를 잘 관리해야 했다.


새해가 밝아도 아침 식탁에서부터 으르렁대는 남매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서로 자신을 더 봐달라고, 혹은 나를 좀 내버려 두라고 녀석들은 계속 내게 신호를 보낸다. 비록 성인군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른이고 엄마인 내가 같이 으르렁대지 말고 먼저 다가가 풀어줘야 한다. 감춰진 속내에 뭐가 쌓였는지, 어디로 불씨가 옮겨 붙으려 하는지 찬찬히 주변을 둘러봐야한다. 너무 힘들 땐 적당히 거리를 두기도 하고, 가끔은 부드럽게 어루만지기도 하면서 서로서로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성경의 잠언 말씀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

인류의 기원과 발전에 있어서 불은 무척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얼어 죽지 않도록 인간을 보호해주었고, 더 맛있고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데도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싸움과 전쟁에 악용되기도 하고 큰 재해로 자연과 사람을 해친 것도 불이다. 호주의 남부지방에서는 두 달 가까이 진화되지 않은 최악의 산불이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는 뉴스가 새해부터 들려온다.


무릇 내 마음을 지키는 것. 내 속의 불을 없앨 수는 없지만, 그것을 적당하고 유용한 에너지로 잘 관리하는 것이 올해 나의 숙제가 된 것 같다.

버럭이가 튀어나올 때마다 차가운 논리의 얼음을 끼얹거나 괜한 부채질을 하진 말아야지. 그보다는 따뜻한 포옹이 나을 것 같다. 손에 따뜻한 차 한잔이라도 건네면서 주변에 불씨가 될만한 것들을 슬슬 치우는 것도 좋겠다.

모든 지혜를 발휘하여 나와 가족의 내면에 자리한 화를 잘 다스릴 수 있기를, 화가 폭발하기 전에 미리미리 솔직하게 서로를 대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지켜주는 것이 바로 가족이고 친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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